창세기 강해 제184강(창34:5-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6일(목)
딸 디나의 일을 전해들은 야곱이 자신의 세력을 모을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다(창34:5).
딸이 큰 도시에 나들이를 나갔다가 벌건 대낮에 갑자기 그곳의 지배자인 젊은 추장에게 끌려가서 강제로 욕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할까요?(창34:1-5) 어느 영화에서 그러한 스토리를 다룬 것 같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겁탈한 자들을 총으로 사살하고 맙니다. 그것은 정당방위일까요? 아니면 살인일까요?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조건 사살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당방위로 보기 힘들 것입니다. 현대의 정당방위는 피해당사자가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 위하여 무기를 사용한 경우에 한하여 인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가라 앉히고 법에 호소를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이야기는 고대사회에서 발생한 사례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피해자의 가족에 한하여 정당한 보복행위가 특별한 경우에 인정이 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고의로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경우입니다(신19:6). 따라서 고대사회에서도 살인의 경우가 아니면 보복행위는 억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의성이 없고 과실 또는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도 스스로 목숨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도피성’ 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신19:4-5).
야곱의 경우에는 분노가 솟아난다고 하더라도 똑 같은 보복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강간을 당한 것은 살인을 당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의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쳐들어가서 가해자를 죽이는 것은 정당방위로 인정을 받지를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정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주민에 불과한 소위 ‘히브리인’입니다. 세겜은 그 도시의 지배족속인 히위 족의 추장입니다(창34:2). 야곱이 부자라고는 하지만 그 세력은 히위 족속 등 가나안 원주민들의 세력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입니다(창34:30). 결국 서로가 격돌하게 되면 어느 쪽이 패망을 할까요? 당연히 야곱의 집안이 멸문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당장은 야곱의 자녀들도 모두 들판에 나가서 목축을 하고 있습니다(창34:5). 의논을 해볼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야곱은 무조건 분노를 삭이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라반의 집에서 20년 세월 동안 억울한 일을 수없이 당해오면서 야곱은 꽤 단련이 되어 있습니다(창31:38-42). 그의 나이도 어느 듯104세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큰 사건을 맞이하고 있는 야곱의 태도가 상당히 진중하면서도 냉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혈기가 방자한 야곱의 아들들입니다(창34:7, 13, 25). 그들이 격분하여 어떻게 잘못 대응할지 야곱은 걱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디나를 며느리로 맞이하기 위하여 야곱의 집안을 방문하고 있는 세겜의 부친 하몰(창34:6)
하몰은 세겜 추장의 아버지입니다(창34:2). 고대사회에서는 효(孝, respecting parents)와 충(忠, royalty)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대하는 것도 주인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도 그 점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요13:13). 그렇다면 젊은 추장 세겜은 아버지 하몰을 극진히 모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러하지가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덮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데 제 마음대로 부친을 동원하고 있습니다(창34:4, 6). 본문을 살펴보면, 세겜은 히브리인 야곱의 딸 디나를 제멋대로 힘으로 욕을 보이고 맙니다(창34:2). 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나서도 디나에게 색다른 매력이 있음을 발견합니다(창34:3). 그래서 아예 아내로 삼고서 평생 옆에 두고 싶어합니다(창34:4). 그 결과 부친 하몰을 중신아비 겸 해결사로 내세우고 있습니다(창34:4).
그가 제멋대로 행하고 뒷수습을 하려고 하는 일은 선후가 완전히 바뀌어 있으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먼저 자신이 야곱을 찾아와서 정중하게 사죄부터 해야만 합니다. 혼사의 이야기는 그 다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얼굴이 두껍고 수치를 모름)하게도 세겜은 아버지를 내세워서 무조건 야곱에게 딸을 아내로 달라고 요구합니다(창34:8). 한편, 그 수치스러운 일에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해결사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아들 세겜을 꾸중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겜 성에서는 그러한 윤리나 도덕의식이 없습니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힘센 자가 모든 것을 호령할 수 있는 사회로 보입니다. 하몰이 추장인 세겜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고 있으므로 그는 아들의 신하와 같습니다. 세겜 성은 효가 앞서는 사회가 아니라 힘이 앞서는 짐승의 사회와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우상을 제 마음대로 섬기고 있는 이방인들이 그러합니다(롬1:21-32). 하나님이 아니 계시면 권력자 마음대로입니다. 효 사상도 인간의 도리도 그 힘에 종속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하몰과 세겜의 부자(父子)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부친 야곱의 소환을 받고서 목축현장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아들들의 반응(창34:7)
야곱의 아들들의 반응은 두 가지라고 모세가 적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창34:7). 첫째는 근심입니다. 자신들의 세력은 약하고 상대방의 세력은 강합니다. 어떻게 응징을 해야만 할지 걱정이 앞서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심하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이스라엘 집안의 딸을 미개한 원주민의 추장이 감히 강간을 한 사건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예 아내로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죄를 하여도 시원하지가 아니한데 도리어 자신들의 누이를 신부로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가 꺼꾸로 솟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흥분이 금물입니다. 지혜롭게 그들을 다루고 보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역시 야곱의 집념과 세상적인 꾀를 대물림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들이 하몰과 세겜을 다루는 방법이 실로 냉정하면서도 기가 막히기 때문입니다(창3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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