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82강(창33: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22. 04:39

창세기 강해 제182(33:2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24()

 

세겜 앞 자신의 땅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는 야곱의 잘못은 무엇인가?(33:20)

 

야곱은 숙곳에서 목축을 하여 더 큰 부자가 됩니다(33:17). 그러자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벧엘로 가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31:3, 28:20-22). 그런데 그는 반대로 행동을 합니다. 남쪽에 있는 벧엘이 아니라 도리어 북쪽의 번화한 도시 세겜을 찾아 갑니다(33:18). 그곳에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오래 정착을 하고자 합니다(33:19). 그렇지만 한 가지 마음에 불편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20여년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 서원한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만약에 가나안 땅 아버지의 집으로 무사히 되돌아오게 되면 반드시 벧엘에 들러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잘 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28:18-22).

그래서 야곱은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 한 켠으로는 남자답게 화끈하게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아버지 이삭이 계시는 남쪽으로 가고 싶습니다(28:10, 35:27).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속 사람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재물을 중시하는 겉 사람과 도시의 화려함을 제대로 누리려고 하는 옛사람의 소원이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마음 가운데 어느 쪽이 승리를 할까요? 전자가 아니고 후자입니다. 그와 같은 갈등과 마음 속 투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야곱의 가족이 세겜 가까이에서 생활을 한 기간은 적어도 4년이 넘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란 땅 장인의 집을 떠나올 때에 장남 르우벤이 13세의 소년이었습니다. 나이계산을 해보자면, 야곱이 하란 땅에 체류한 기간이 20년입니다(31:41). 그는 7년 머슴살이가 끝나자 아내를 얻게 됩니다(29:18-23). 그 이듬해에 장남 르우벤을 생산합니다(29:31-32). 그러므로 르우벤은 13세가 되자 외가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세겜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르우벤이 20세 약관의 나이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세겜 성의 히위족속을 급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4:25). 동생들이 전투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17세에서 20세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가족은 적어도 7년의 세월을 숙곳과 세겜에서 지낸 셈입니다. 숙곳에서 2-3년 목축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세겜에서는 4-5년간 지낸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7년 세월을 제멋대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야곱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속 사람이 아니고 겉 사람과 옛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스스로 가나안의 원주민인 세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는 신앙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겜 성읍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집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33:20). 여기서 야곱이 세겜 성 교외의 자기 집에 제단을 쌓고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33:20a). 그런데 문제는 그 제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33:20b). 그 뜻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돕고 보호하시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30:30, 32:28). 벧엘에서의 야곱의 맹세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서원이 이루어지도록 신실하게 이행하신 하나님이십니다(31:3-13, 24, 33:4). 이제는 가나안에 들어온 이상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제 마음대로 변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벧엘에 만들어야만 하는 제단을 세겜 교외의 자기 집에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 벧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야곱이 만나러 가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벧엘의 하나님께서 세겜 교외의 야곱 집으로 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셋째, 그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집에 좋은 제단을 만들었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시고 야곱 자기만을 위하여 일종의 수호신이 되어 주시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하는 교만한 사상입니다. 어느 사이에 야곱이 하나님을 오라 가라 하면서 부리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영적인 타락은 그렇게 야곱의 집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자신에게 형통함을 주는 도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주는 제물을 받고서 수호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야곱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은 세겜 성의 화려함에 취하고 자신의 막대한 부가 가져다 주고 있는 생활의 안락함에 젖어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려고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말 속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33:20). 그에게는 더 이상 벧엘의 하나님이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세겜 교외에 있는 자기의 집에 모셔도 됩니다. 벧엘에서의 서약을 자기 마음대로 세겜에서 이행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집에도 나중에 실컷 세상살이의 재미를 본 다음에 아버지가 죽기 전에 도착을 하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35:27-29). 그 옛날 벧엘에서의 절실함이 야곱에게서 사라지고 없습니다(28:10-22). 어느 사이에 야곱은 자신도 모르게 편리한 이방인들의 도구주의적인 우상문화에 오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세상의 낙을 제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야곱을 어떻게 하면 정신을 번쩍 차리도록 만들 수가 있을까요? 당근이 아니라 채찍을 휘두르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이 제34장에서 엿보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