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80강(창33:12-1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2일(주일새벽)
형 에서의 호의를 끝까지 거절하고 있는 야곱은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을 의지하지 아니하다(창33:12-15).
오직 야곱은 형 에서에게 잘 보여서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온갖 아부의 말과 지나친 행동을 다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를 자신의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창33:5, 8). 형의 얼굴을 대하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33:10). 그것은 지나친 아부입니다. 뿐만 아니라 뇌물에 해당하는 엄청난 예물을 에서에게 주고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차제에 확실하게 용서를 받고자 합니다. 그렇게 에서의 환심을 사서 죽을 목숨이 살아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그것이 완전한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험한 길에 자신이 군사들과 함께 동행해주겠다고 하는 형의 호의를 야곱은 한사코 거절하고 있습니다(창33:12-14). 에서가 그 대안으로 자신의 사병 몇 사람이라도 야곱의 호위무사로 붙여주려고 합니다(창33:15a). 그러나 야곱은 그 제의마저도 끝까지 거절하고 있습니다(창33:15b). 에서는 야곱의 태도가 너무 완강하므로 어쩔 수 없이 세일 산으로 되돌아 가고 있습니다(창33:16).
그렇다면 야곱이 형을 자신의 주인으로 부르면서 에서를 하나님 보듯이 대접하고 정성껏 섬기겠다고 말하고 행동한 것은 순전히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살리겠다고 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형을 존중하고 상전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 유월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살아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당시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그러므로 야곱이 진심으로 형 에서를 사랑하고 섬기게 될 때에 에서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것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형으로부터 자신의 이득만을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여전히 인본주의입니다. 야곱은 하나님도 자신의 보호자로서 이용하고 형도 그저 환심을 사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부와 뇌물을 사용하여 에서의 환심을 사고 야곱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도 한갓 이용대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야곱도 변화가 되고 형 에서도 변화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그 점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를 그의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7-19).
뜻을 풀이해보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먼저입니다(갈1:10).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막12:30-31, 롬14:18). 만약 하나님 사랑이 인간사랑으로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기에 발생하는 불상사입니다. 그저 신본주의에 치중하여 율법적인 종교생활을 영위할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막7:11-13). 주님의 뜻은 모두가 화평하는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족식을 행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요13:13-15). 서로가 종이 되어 상대방을 진심으로 섬기고 사랑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변화가 찾아옵니다. 결론적으로, 서로 먼저 사랑하고 서로 먼저 상대방을 섬기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롬14:17-19). 야곱은 결코 그와 같은 복음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아직 아닌 것입니다.
참고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서양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장 주요한 차이점은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차이입니다. 인본주의에 입각하고 있는 헬레니즘은 하늘의 지혜를 사람이 깨닫고 얻게 되면, 그러한 자 소위 ‘철학 왕’이 이 세상을 이상세계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신본주의에 입각하고 있는 헤브라이즘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므로 먼저 구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후에는 창조주 앞에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에 속하고 있는 야곱 역시 신본주의에 입각하여 형 에서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형 에서의 마음의 변화로 형제간의 화해가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가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언약의 상대방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외삼촌 라반과 같이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요컨대, 야곱은 에서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신본주의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또 한편으로 야곱은 그의 행동에 있어서는 신본주의가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고 행하고자 하는 다분히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야곱의 판단과 행동을 하나로 통일시켜줄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위에서 살펴본 그리스도의 복음적인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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