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79강(창33:6-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1일(토)
야곱의 처자식의 절만 받고서 에서가 야곱의 예물을 받지 아니하려고 하다(창33:6-9).
에서가 먼저 야곱에게 달려와서 그를 반갑게 포옹하고 있습니다(창33:4a). 그리고 형제끼리 입을 맞추고 서로 울기를 시작합니다(창33:4b). 단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야곱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 가운데 버젓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그 일은 하나님의 새 일 행하심입니다. 훗날 선지자 이사야가 정확하게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사48:6-7).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는 쉬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자연과 인간사회 속에서 창조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 곧 새 일을 끊임없이 행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새로운 창조에 관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전에 예언으로 일부 계시해주기도 합니다.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상과 하나님과의 차이를 깨닫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새로운 일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들은 피조물이 만든 것들이라 새로운 일을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사람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마치 세상 일을 모두 아는 것처럼 또는 미래지사를 점칠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새 일을 행하시는 창조주 앞에 서게 되면 얼마나 허무하고 교만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 때부터 올바른 하나님 경외가 시작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얍복 시냇가에서 야곱이 그와 같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놀람과 반가움은 잠시입니다. 조금 후에 감격적인 형제상봉이 끝나자 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둘러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보이고 있습니다(창33:5a). 에서의 질문에 야곱이 친절하고도 겸손하게 대답을 합니다(창33:5b). 그 말 가운데에는 두 가지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에서를 자신의 주인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함께 하고 계심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창33:5). 사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가를 이루게 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막강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신을 보호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야곱이 형 에서에게 각인시키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실 때문에 일찍이 라반이 물러갔듯이(창31:42, 55) 형 에서도 그렇게 물러가기를 야곱이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심리를 살펴보자면, 20년 만의 형제상봉이라 본능적으로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때부터는 새로운 셈법이 다시 시작이 됩니다. 어쩐지 억울한 것만 같고 그리고 자기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수지타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가 그렇게 제 정신을 차리게 되면, 그때부터 야곱에게는 위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야곱입니다. 일찍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철저하게 피해를 입고 장인의 약은 꾀에 농락을 당한 바 있기에 야곱이 사람의 본심과 그 행동양상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에게 극존칭을 사용하고 그의 비위를 만족스럽게 맞추어주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빠르게 서로 헤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기서는 재빨리 자신의 처자식을 인사시키고 있습니다. 그 순서는 역시 ‘4’순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실바와 그 자식들, 빌하와 그 자식들, 그 다음에 레아와 그 자식들, 마지막으로 라헬과 요셉의 순서입니다”(창2, 33:6-7). 그 다음에는 에서가 벌써 만난 바 있는 가축의 떼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창33:8a). 야곱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의 성의를 가지고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창33:8b). 그저 형을 왕으로 알고 잘 모실 터이니 지금부터 과거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고 무조건 잘 봐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은혜를 입으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형을 믿지 못하고 있는 야곱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반면에 에서는 우직하면서도 담대합니다. 그래서 형답게 한 마디를 던지고 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창33:9).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야곱은 영 마음이 불편합니다. 예물을 충분하게 받고서 모든 계산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세력이 약한데 막강한 형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여서 불안하기가 그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한사코 많은 예물을 에서에게 주면서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하다(창33:10-11).
야곱은 한사코 그 많은 예물을 형 에서에게 주고자 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예물의 규모를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뇌물의 성격입니다. 물건을 주고서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에서의 환심을 산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이득을 얻고자 함입니다; 첫째, 에서가 그 뇌물을 받아들이게 되면 일단은 야곱과 처자식의 안전은 당분간 확보가 될 것입니다. 에서가 우직하면서 충직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야곱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나이다운 호걸, 곧 ‘들 사람’ 에서인지라 한번 용서를 하게 되면 그 점에 대해서 재론을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창25:27).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그 많은 재물을 떠다 안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창33:10-11). 둘째, 그는 벧엘에 들르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 집에 도착을 해야만 하는 운명입니다(창31:3, 13). 이미 아버지 이삭은 157세의 고령입니다. 자연히 집안의 실세는 형 에서입니다. 그와 아버지 집에서 다시 마주쳐야만 합니다. 그곳에서 20년 전에 형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가로챈 사람이 바로 자신입니다(창27:36). 에서가 그 원한을 자신의 많은 예물을 받고서 확실하게 풀어주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러나 엔간해서는 에서가 자신의 예물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창33:9). 그래서 마지막으로 야곱이 형 에서의 기분을 최고도로 맞추어주면서 그 뇌물 성향의 예물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 대목에 대한 모세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 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창33:10-11). 야곱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같이 영광스럽다고 하는데 그 어떤 피조물이 기분이 좋지 아니하겠습니까?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피조된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 그것이 포기할 수 없는 꿈입니다(롬8:15-25). 그래서 에서가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서 동생 야곱이 떠다 안기는 그 많은 예물을 마침내 받게 되고 맙니다. 드디어 야곱은 한숨을 돌리게 됩니다.
'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해 제181강(창33:16-19)(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20 |
---|---|
창세기 강해 제180강(창33:12-15)(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20 |
창세기 강해 제178강(창33:3-5)(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18 |
창세기 강해 제177강(창33:1-3)(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18 |
창세기 강해 제176강(창32:31-32)(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