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74강(창32:27-2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1월 27일(월)
드러나고 있는 어떤 사람의 정체(창32:28, 30), 그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다(창32:27-28).
예수님이 시몬을 제자로 거두시면서 그의 이름을 장차 ‘게바’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요1:42). 그 뜻은 아람어로 ‘반석’입니다. 후에 시몬은 ‘게바’ 또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헬라어로 ‘베드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제자 시몬은 나중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됩니다. 오늘 날도 베드로와 같이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는 어떠한 자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얍복 시냇가의 야곱처럼 하나님의 사자의 옷자락을 잡고서 필사적으로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는 자여야만 합니다. 세상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천사라고 하여 봐줄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보다 힘이 세다고 하여 미리 겁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상전이신 하나님에게 야곱의 필사적인 처절한 사정을 보고하고 즉시 구원과 축복의 메시지를 전해올 때까지 그렇게 매어 달려야만 하는 것입니다(창32:30). 그와 같이 할 때에 비로서 야곱과 같은 인간이 이스라엘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32:28)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말의 뜻을 살펴봅니다; “죽을 운명을 살 수 있는 운명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에게 죽기살기로 매어 달린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얍복 시냇가에서 꼼짝없이 죽을 목숨입니다;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창32:11). 그래서 하나님께 밤새 기도로써 매어 달렸습니다(창32:24).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야곱을 살려주십니다. 에서의 마음 속 원한을 밤 사이에 봄눈이 녹듯이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드디어 다음 날 형제간 화해가 극적으로 이루어집니다(창33:4).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밤새 하나님의 사자의 옷자락을 잡고서 끝까지 사투를 벌인 야곱의 승리입니다.
참고로, 그 어떤 사람의 정체에 대하여 야곱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32:30). 하나님과 대면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창32:24)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하나님을 바로 만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고 있는 대리권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마치 현지의 대사가 자신의 주재국에서 자국의 최고 통치자의 권위를 대신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묵상을 해보면, 얍복 시냇가에서 야곱과 씨름을 한 하나님의 사자는 그 배분이 상당히 높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사람들과 겨루어서 이겼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야곱이 라반 및 에서와 싸워서 이긴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장인 라반의 상대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힘이 약했고 세력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번번이 계약의 조건을 일방적으로 변경을 시켜도 매번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창31:41). 그러나 야곱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고 부르짖은 것으로 보입니다(창31:42). 그 결과 라반의 꾀가 자신의 함정이 되고 맙니다(창31:7-9). 에서와의 경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에서의 상대가 되지를 못하는 동생입니다. 힘이 약하여 모태에서 나올 때에도 겨우 형의 발목을 잡았을 뿐입니다(창25:26). 그런데 어떻게 형 에서마저 물러가게 되는 것일까요? 그 비결은 오로지 야곱이 하나님 신앙을 파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의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세상을 이기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자”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제자 시몬이 장차 ‘게바’가 되는 것에 비해서(요1:42) 야곱은 얍복 시냇가에서 곧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이 되고 있습니다(창32:28). 시몬의 경우에는 장차 완벽한 신앙고백을 하게 됨에 따라서 그 이름의 뜻 그대로 교회의 반석이 되고 있습니다(마16:16-19). 그렇지만 야곱은 이미 얍복 시냇가에서 그의 운명이 바뀌고 있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32:28). 구체적으로, 형의 발목이나 겨우 잡고서 쫓기는 신세에서 일약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하고 영적인 장자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족장으로 서게 되는 변화를 곧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창25:26, 33:4, 16-20).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주고 있는 축복의 내용은 그렇게나 ‘파우어풀’(powerful)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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