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75강(창32:29-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17. 15:36

창세기 강해 제175(32:29-3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8()

 

그 사람의 정체를 더욱 확실하게 파악하려는 야곱, 그러나 그 사람은 축복으로 대신하다(32:29).

 

하나님의 사자로 보이는 그 어떤 사람이 야곱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32:29). 그 대신에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 사람은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정확하게 밝히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보이는 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습니다(9:17). 그런데 그 부대 보다는 포도주가 더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종의 이름과 신분보다는 주인의 이름과 맡기신 그 사명이 더 중요합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그 정체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시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8:25),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말씀으로 그리고 계시로 이 세상에 전하고 계신 분입니다(11:27). 예수님이 자신은 하나님의 영을 담고 있는 그릇이며 그 능력의 말씀의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신분을 밝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 왔는지를 구별하는데 더 신경을 쓰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사렛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또 다시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려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서 문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7:22).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실 때에 하나님 사람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속한 자임을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면, 야곱과 얍복 시냇가에서 밤새도록 씨름을 한 것으로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그 어떤 사람은 이미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고 있습니다(32:28a). 그 뜻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어 그의 운명을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32:28b). 그런데 야곱은 진짜 자신의 죽을 운명이 다시 살아날 운명으로 바꾸어진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의문을 해소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간절한 눈빛으로 그 사람에게 신분과 정체를 밝혀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32:29a).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아니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32:29b).

그 대신에 야곱으로 하여금 확실히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저주 가운데 생명과 복을 얻게 되었음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30:19). , 그 어떤 사람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베풀어줄 수 있는 축복을 해주고 있습니다(32:29c). 그와 똑 같은 일을 훗날 야곱이 애굽의 황제 바로를 만나는 자리에서 행하고 있습니다(47:7, 10). 야곱이 얍복 시냇가에서 배운 바대로 자신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그렇게 실천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모세오경에 따르면, 생명과 장수함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30:20). 그것을 얻게 된 야곱이기에 하나님을 만난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이제 날이 밝아져서 형 에서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33:4).

 

그 사람의 정체가 멜기세덱이 아니고(14:18) 하나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야곱이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다(32:30).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천사들의 현신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다음과 같이 각각 다르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영 분별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말씀의 현신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15:1)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신하여 아브라함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브라함도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현신에 대해서는 두 차례나 아브람이 즉각 알아채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17: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18:1),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18:3). 영 분별이 탁월하기에 아브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상대방이며 동시에 대화의 상대방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 두 천사를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 사람(천사)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18:22). 두 천사가 떠나가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돔의 롯을 구하기 위하여 의인 10명만 있어도 불 심판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자 합니다(18:23-33).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원정을 온 침략군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대승을 거두고서 가나안 남쪽으로 개선을 합니다. 그때 환영식장에 난데없이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14:18). 멜기세덱의 축복의 말씀을 들은 후 아브라함이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을 만난 자리이므로 당연히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제사장 멜기세덱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영 분별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참고로, 그 반대의 경우를 롯에게서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19:1-3). 야곱의 경우도 롯의 경우와 대동소이합니다.

본문에서 야곱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인 그 어떤 사람과 하나님의 본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살려준다는 축복의 말씀을 그 사람을 통해서 대신 전해 듣고서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 일찍이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천사들,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 등을 두루 만나본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아브라함을 만나도록 사전에 조치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사람의 모습으로 만났다고 하여 결단코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 만나고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저 혼자 감격에 겨워서 그곳의 지명을 아예 브니엘하나님을 본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32:30). 그의 감격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죽을 운명이 되살아나게 된 데서 기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형 에서의 위험에서부터 자신을 구해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 사자를 통하여 듣게 된 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과 진배가 없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죽을 운명이 살 운명으로 바뀌고 있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성도들의 기쁨과 변화를 가장 쉽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