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73강(창32:24-2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1월 27일(월)
처자식과 자신의 명운이 에서의 손에 달려 있는 긴박한 순간에 밤새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고 있는 야곱(창32:24).
흔히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승부의 수를 썼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운명의 패가 던져진 것입니다.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열차가 궤도 위를 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그러한 경우를 더 알기 쉽게 ‘기호지세’(騎虎之勢,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과 같은 형편)라고 말합니다. 지금 야곱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는 요단 강 중류로 흘러서 들어가고 있는 얍복 시내를 북에서 남으로 이미 건넜습니다. 숙적 에서가 북진해오고 있는 그 앞길에 자신의 재물을 앞세우고 그 뒤에 처자식을 배치한 것입니다. 제일 뒤편에 자신이 홀로 남아서 이제 날이 밝으면 찾아올 운명과 마주하고자 합니다.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자신과 처자식의 운명이 마치 에서의 심중에 달려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와 같은 절박한 때에 야곱이 밤의 어두움 가운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밤새도록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였다”라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창32:24).
얍복 시내를 건너기 전까지만 해도 야곱에게는 도망을 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북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북쪽에 살고 있는 장인 라반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이미 맺었기 때문입니다(창31:52). 그리고 요단 강을 건너 서편 가나안 땅으로 재빨리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곳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지만 동시에 형 에서의 홈 그라운드로 들어가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남쪽으로 도망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사해 남쪽 세일 산에서 한창 용맹을 떨치고 있는 에서가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야곱을 향하여 북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32:3, 6). 그렇다면 그가 도망을 갈 수 있는 길은 동쪽밖에 없습니다(창25:6, 욥1:3)”. 그런데 야곱은 그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얍복 시내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넜습니다(창32:23). 그러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야곱은 왜 숙적인 에서와 마주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걸어놓고 야곱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치 시저가 로마로 흐르고 있는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과 동일한 결단입니다.
한 세상을 살면서 사람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항상 서게 됩니다; “첫째는 세상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버릴 수가 없는 경우에는 어느 것을 더 우선으로 해야만 하는지 그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길르앗을 떠나 남하하고 있는 야곱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보자면, 에서와 만나지 말고 일찌감치 동쪽으로 가버리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지식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창28:15, 31:3) 엄청나게 의지하고 있습니다(창31:13, 32:9-12).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얍복 시냇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창32:24). 길르앗 산에서처럼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구원해주실 것인지(창31:24, 29, 55) 확신이 서지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미래를 모두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한없이 불안하고 그 믿음이 나약해지는 것은 사람인 이상 당연합니다. 특히 야곱은 형 에서와의 20년 전의 일을 생각할 때에 더 불안해집니다. 야곱은 20년 전에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형 에서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힌 가해자입니다(창27:36). 에서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모두 빼앗아서 부모님의 도움으로 겨우 북부 시리아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창27:45-28:5). 한 마디로, 에서에게 잡히면 죽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동쪽으로 도망을 쳐볼까도 진작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길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계십니다. 반드시 가나안으로 되돌아가서 벧엘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아버지를 만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창31:3a, 13). 그렇게 해야만 야곱 일행을 지켜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창31:3b). 따라서 야곱은 무지무지하게 불안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한번 더 믿어 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창32:24).
씨름의 결과 허벅지 관절이 위골이 되고 마는 야곱, 도망할 가능성이 완벽하게 사라지자 야곱이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창32:25-26)
인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해주었기에 그것은 당연합니다(창1:26). 그러므로 야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세력이 불리하면 도망을 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은 얍복 강을 건너와서 하나님과 마지막 담판을 하려고 합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창32:24). 그렇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최후의 순간에는 혼자서라도 도망을 치고자 하는 속셈이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처자식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일까요?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7년 동안 외삼촌 라반을 섬기면서 무료로 머슴살이까지 한 야곱입니다(창29:18-20). 그렇지만 야곱이 라헬과 그의 소생인 요셉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도망을 칠 수도 있는 야곱입니다(막14:27).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대리자인 어떤 사람을 통해서 씨름 도중에 갑자기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록 쳐버리고 있습니다(창32:25). 그 뜻은 이제 전혀 도망을 칠 수가 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야곱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구원을 얻어야만 할 때입니다.
야곱의 일행을 살려주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면 자신과 처자식은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야곱은 절박합니다. 이제 도망을 칠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사자로 여겨지는 그 어떤 사람에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b). 모든 것을 걸고서 매어 달리고 있는 야곱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지 하나님의 사자로 여겨지는 그 사람이 차마 그것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그 사람은 어쩌면 독생자의 현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1:14). 그래서 완력으로 뿌리치지를 아니하고 우선 말문부터 열고 있습니다;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창32:26a). 물론 야곱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풀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얻지 아니하면 죽은 목숨이 되고 말 것인데 어떻게 그냥 지나가도록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의 대목에서 나타나고 있는 야곱의 필사적인 모습이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는 성도들과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매어 달려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서 매어 달려야만 합니다. 그냥 인생 가운데 지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구원을 달라고 필사적으로 매어 달릴 때에 비로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 속사람 속에 성령님이 강림하시고 내주하십니다(요14:14-17). 복음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눈이 열립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인생이 시작이 됩니다(행1:8). 비로서 원수인 에서와의 화해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창33:4, 롬12:18-21).
결론적으로, 만약 다른 한 손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복을 얻는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야곱처럼 도망을 칠 수 없는 절뚝발이 상태가 되었을 때에 비로서 완전한 매어 달림이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양 손에 떡이 아니라 한 손에만 떡을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모두 소진이 되고 사용할 수가 없게 될 때, 곧 살거나 죽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을 때에 주님의 구원의 십자가가 빛을 발합니다(막5:26-34). 그 순간에 얻게 되는 구원의 은혜가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 뜻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창3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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