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72강(창32:13-2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1월 26일(주일새벽)
야곱이 형 에서에게 줄 예물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다(창32:13-20)
야곱은 형 에서가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자기를 만나고자 북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 정신이 없습니다(창32:6-7). 에서가 옛날의 악감정을 가지고 자기를 죽이러 오는 것으로 지레짐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맞은 사람은 발을 뻗고 자지만 때린 사람은 그렇지 않다”라고 합니다. 여기 야곱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비록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그가 에서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몽땅 가로채어서 집을 떠난 일이 역시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입장을 바꾸어서 야곱 자신이 동생으로부터 그와 같은 경우를 당했다고 한다면 그가 사는 곳 가까이까지 찾아가서 몰래 보복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가타부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갑자기 야곱이 소식을 전하자 엄청난 수의 사병을 이끌고서 바람처럼 야곱이 있는 곳으로 진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창32:5-6).
야곱이 그 대책을 수립합니다. 그것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선 처자식을 살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재산은 절반을 희생하더라도 나머지 절반을 살리고자 합니다(창32:8). 그래야 만약 살아남는 처자식이 있다면 그들이 먹고 살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순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린 것입니다(창32:9-12).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야곱을 축복하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벽하게 지켜주겠다고 하셨습니다(창31:3, 13, 32:9). 그래서 라반도 물리쳐주셨습니다(창31:24, 29). 이제 에서마저 물리쳐달라고 소원하고 있습니다(창32:11). 한 마디로, 언약의 완전한 이행을 하나님께 촉구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래서 야곱은 나름대로 그 다음의 대책을 수립하여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물로 드리겠다고 에서에게 전령을 보내어 이미 말한 그대로(창32:5) 요령껏 예물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세 떼 정도로 나누어서 거리를 두고서 배치합니다(창32:16, 19). 모세는 그 예물의 숫자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양의 예물인지를 독자들에게 말하기 위함입니다. 야곱이 불안하고 위기를 느끼는 그 만큼 형 에서에게 목숨구걸의 값으로 주는 예물의 양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암 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 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 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창32:14-15). 염소와 양은 비교적 값이 싼 대신에 그 숫자가 많습니다. 낙타나 소 그리고 나귀 등은 비싼 동물들이기에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리고 암컷의 수가 수컷의 수보다 월등하게 많은 것은 그것이 고가(高價)이기 때문이며 또한 동물의 세계에서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이기 때문입니다. 예물의 양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야곱은 그 예물을 에서에게 주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물을 주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형 에서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창32:20). 재물로써 목숨을 구걸하고자 하므로 최대한의 성의표시가 드러나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에서가 그만하면 족하다고 하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둘째로, 그래도 에서가 만족하지를 못하고 과거의 원한 때문에 공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예물로 주는 가축의 떼가 그 공격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어야만 합니다(창32:8). 이상 두 가지 목적에 맞도록 야곱이 예물을 드리는 순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물로 드리는 가축을 우선 세 무리로 나누고 있습니다(창32:16a, 19). 그리고 무리 사이에 간격을 벌리고 있습니다(창32:16b). 둘째, 각 무리 앞에 똑똑하고 담대한 일꾼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에서가 웬 가축이냐고 문의할 경우에 분명하게 “주의 종 야곱이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창32:18)라고 대답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셋째, 그 뒤에 가축 떼를 몰고 가는 목동들이 뒤따르고 있습니다(창32:19a). 그들도 같은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창32:19b).
위와 같이 큰 길을 막고서 행진하고 있는 세 무리의 가축의 떼를 모두 뚫고서 에서가 야곱에게 도달하기까지에는 분명히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처자식들이 살아 남을 확률을 높여보고자 하는 것이 야곱의 책략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물 뒤에 처자식을 배치하고 그 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야곱(창32:21-24)
예물을 모두 순차적으로 배치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창32:21). 야곱은 이제 2처2첩과 11명의 아들 그리고 딸들을 인도하여 얍복 시내를 건너고 있습니다. 시냇가 남쪽에 처자식을 먼저 건네 놓고서 야곱은 그 뒤에 좀 떨어진 곳에 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날 밤은 도저히 잠이 오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처자식의 명운이 함께 걸려있는 것이 다음날 새벽입니다. 형 에서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많은 예물을 받고서 과거의 원한을 풀어줄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원한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을 몰살할 것인지 상대방의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원수의 마음을 읽지도 못하고 미래의 일을 모두 대비도 하지를 못한 채 그 날이 드디어 밝아온다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날 밤에 잠이 들지를 못한 채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32:24). 사도 바울의 말 그대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씨름입니다(엡6:12). 그 한 밤중에 아무도 없는 얍복 시냇가에서 홀로 남은 야곱이 누구와 씨름을 하겠습니까? 영적인 존재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생각이 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했으나 이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창32:25). 그 이유는 야곱이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에서에게 지기가 싫어서 마지막 순간에 머리가 태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형의 발목까지 잡고서 결코 놓지를 아니했던 집념의 사나이가 야곱입니다(창25:26). 그의 집념과 집착이 하나님의 사자의 현신을 잡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사자의 발목을 잡고서 매달린 채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사자는 이제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입니다(창32:26a). 그런데 야곱 때문에 낭패입니다. 드디어 야곱이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살려준다는 축복의 말씀을 전해주고 가라는 것입니다(창32:2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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