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도45(작성자; 손진길)
45세의 다윗왕이 이스라엘제국을 완성하는 마지막 전투인 암몬 랍바성의 공격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그해 가을에 예루살렘의 시온성에 남아서 큰 죄악을 범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궁궐로 불러서 통간하고 뜻밖에 그녀가 임신하게 되자 그 남편인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모살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암몬의 랍바에 나가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현지의 사령관 요압에게 밀명을 내려서 우리야 장군을 전장에서 죽게 한 것이다. 그를 선봉장으로 내세우고 지원을 해주지 아니함으로써 랍바의 성에서 쏘는 화살에 우리야 장군이 그만 전사하고 만다;

당시 다윗왕을 섬기고 있는 30명의 용장을 관리하고 있는 책임자가 바로 군부대신인 아히도벨이다. 그는 헷족속 출신인 용장 우리야가 랍바성의 공격에서 전사하고 나자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수하에게 자세하게 감찰하여 보고서를 올리라고 지시한다.
감찰부관의 조사보고서를 읽고서 군부대신 아히도벨이 충격을 받는다. 그 이유는 한창 선봉장인 우리야 장군이 랍바성을 공격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지사령관 요압이 지원을 중지시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야 장군이 적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고 만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감찰부관이 정확하게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첫째, 며칠 전에 갑자기 우리야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불려갔다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둘째, 요압 사령관이 선봉장인 우리야에게 지원을 끊은 이유가 아무래도 비밀리에 예루살렘에서 온 왕의 밀사가 다녀간 일과 관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야의 시신을 운구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의 아내 밧세바가 장례를 치루면서 그렇게 애절하게 통곡했다고 한다(삼하11:26).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과부인 밧세바가 다윗왕의 후궁으로 입궁하고 말았다는 것이다(삼하11:27);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군부대신 아히도벨이 느끼고 있다. 그래서 신중하기로 소문이 난 책사인 군부대신 아히도벨이 그 일을 은밀하게 추적한다. 그러자 밧세바가 다윗왕에게 불려 가서 왕과 통간하였다는 비사가 왕궁의 내시들로부터 은연중에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녀가 임신하게 되고 그 남편이 죽게 되는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된 군부대신 아히도벨은 다윗왕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세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그와 같은 엄청난 일을 군부대신인 아히도벨 자신과 일체 상의하지 아니하고 다윗왕이 현지사령관인 요압 그것도 왕의 조카인 그와 상의하여 몰래 해치워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군부대신을 무시한 것이며 허수아비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는 군부대신과 사령관 등의 공신이 필요하지만 일단 제국을 완성하고 나면 공신들을 제거하고 현실정치에서 소외시키지 않겠느냐?고 하는 우려이다. 그러므로 아히도벨 자신이나 왕의 조카인 요압도 언젠가는 권력의 자리에서 내어 쫓기고 말 것이다.
셋째로, 아히도벨 자신은 다윗왕이 전체 이스라엘왕국의 국왕이 된 시점에 아디노 장군의 뒤를 이어서 군부대신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엄청 큰 공을 세웠다. 몇가지의 예만 들어보더라도 다음과 같다;
(1) 첫째, 수도를 이스라엘왕국의 중심지인 시온성으로 옮기자고 재사인 후새와 함께 제안하여 그 안을 관철시켰다. 그 덕분에 다윗의 이스라엘왕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2) 둘째, 갈릴리 동북면의 강대국인 아람의 여러 나라를 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서 정복전쟁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3) 셋째, 왕숙인 요나단을 특사로 보내어 미디안왕국과의 친선관계를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에돔왕국을 고립시켰다. 그 결과 에돔왕국을 쳐서 이스라엘왕국에 복속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와 같은 자신의 공은 다윗왕의 전공보다 못하지가 않다. 그런데 모든 업적은 다윗왕의 것이며 실제로 전략을 수립한 군부대신 아히도벨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대단하다. 자신보다 별로 나은 점이 없는 다윗은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되고 실무적으로 수고한 아히도벨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히도벨은 다윗왕의 치부를 알게 되자 그만 견디지를 못하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다. 같은 유다지파인 유력자 아히도벨의 집은 베들레헴과 헤브론 사이에 있는 좋은 마을 길로이다.
마지막으로 섭섭한 것은 아히도벨이 낙향하겠다고 상소를 올리자 다윗왕이 얼른 접수하고 그동안 아히도벨을 보좌하고 있던 왕숙인 요나단을 승차하여 군부대신으로 발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왕은 진작에 아히도벨 자신을 견제하고 물러나기를 기다렸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한 섭섭한 감정을 지니고 낙향하여 길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히도벨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헤브론으로 행차한 왕자 압살롬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히면서 은근히 부친 다윗왕의 치부를 신하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부왕 다윗을 물리치고 젊은 왕자이며 미남자인 압살롬이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되고자 하는 반역의 조짐이다.
그 도중에 왕자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25리나 떨어져 있는 길로로 사람을 보내어 아히도벨 자신을 책사로 청빙한다(삼하15:12). 헤브론으로 찾아간 아히도벨에게 압살롬은 예의를 다하여 절을 하면서 부디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그것을 보고서 아히도벨이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따진다;

아히도벨이 속으로 생각한다; “왕자 압살롬은 그 준수하기가 다윗보다 더욱 미남자이며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한편 노회한 자신이 다루기에는 늙은 구렁이 다윗보다 더 쉽다. 그렇다면 압살롬을 국왕의 자리에 앉히고 내가 섭정을 하면 되겠구나. 이제 이스라엘제국은 나의 것이 된다. 하하하… ”.
군부대신을 역임한 천하의 재사인 아히도벨이 압살롬 왕자를 도와 반역을 하자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들의 군대에 엄청난 신하와 장수들이 몰려든다. 그 이유는 가는 곳마다 압살롬이 부왕인 다윗의 실책과 밧세바와의 간통사건 그리고 우리야 장군을 암살한 흉계를 크게 홍보했기 때문이다.
압살롬의 반란군들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에 군부대신 요나단과 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벗이며 재사인 후새를 통하여 판세를 읽은 다윗왕이 요단강을 건너 피신하고자 한다(삼하15:13-17). 그것이 당장은 부자간의 충돌을 예방하고 가까운 미래에는 동쪽의 군사기지 마하나임에서 재기를 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압살롬을 돕고 있는 재사 아히도벨이 틀림없이 직접 군사를 몰아 다윗왕을 추적할 것만 같다. 대군을 이끌고 곧바로 요단 강을 건너온다고 하면 다윗왕은 마하나임에서 군대를 재정비하지 못하여 패전하고 만다. 따라서 다윗왕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디 아히도벨의 계책이 실패하도록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로써 도움을 구하고 있다(삼하15:31);

그리고 다윗왕은 고맙게도 자신을 찾아온 유일한 벗이며 책사인 후새에게 신신당부한다; “나의 벗 후새, 짐은 여호와 앞에 죄인이며 나의 친구들에게는 얼굴을 들 수가 없는 부끄러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우리가 피땀을 흘려서 마련한 이스라엘제국을 반역한 왕자 압살롬과 역신 아히도벨에게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한번만 도와주세요. 과인은… “(삼하15:32-34 의역).
그 말을 듣자 후새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대답한다; “구체적인 말씀을 아니하셔도 소신이 다 알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폐하의 잘못을 크게 선전하면서 지금은 세력을 모아서 반역에 성공하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다음에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복형인 암논 왕자를 암살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부왕에게 반역하는 잘못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
후새가 진심으로 말한다; “나는 아비새 장군으로부터 나의 벗인 다윗왕이 사울왕에게 쫓기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목을 두번이나 베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나의 벗인 다윗왕은 결코 반역을 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압살롬은 다릅니다. 그는 반역자이지요.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민심이 폐하에게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
후새가 결론을 말한다; “저는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투항하고 묘책을 내어 당장 압살롬의 반란군이 요단 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벗인 다윗대왕이 마하나임에서 군세를 회복할 시간을 벌 수가 있지요. 폐하, 걱정하지 마시고 소신에게 맡겨 주세요.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삼하15:34-37).
그 말을 듣자 다윗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후새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말한다; “나와 같은 부끄러운 죄인을 끝까지 벗으로 대해준 후새 자네에게 감사하네. 부디 그렇게 해주게나.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이 나라를 다시 새롭게 하고 싶어. 이것은 나의 진심이야… “.
후새가 거짓 투항을 하고 보니 예루살렘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책사 아히도벨이 반란의 괴수인 왕자 압살롬에게 도덕적인 흠집을 내어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고자 한다. 그 술수가 바로 다윗왕이 궁궐에 남기고 간 후궁 10명을 백주에 천막을 치고서 왕자 압살롬으로 하여금 통간하게 한 것이다(삼하15:16, 16:21-23);

그 일을 권하면서 아히도벨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우리를 돕고 있는 신민들이 속으로는 다윗왕의 위엄에 눌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다윗왕이 한갓 패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
아히도벨이 냉정하게 왕자 압살롬에게 말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왕은 패전한 왕의 아내를 취하여 온세상에 이제는 자신이 그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공포합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이제 다윗이 남기고 간 아내들을 한꺼번에 취하여 신민들에게 이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눈으로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자신의 아내도 지키지 못한 다윗왕을 예루살렘 백성들이 비웃고 그의 두려움에서 모두 벗어나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일로 말미암아 왕자 요나단은 여호와 앞에 왕이 될 수 없는 두가지의 잘못을 범하고 만다; 하나는, 비록 이복형이지만 혈육인 암논 왕자를 자신이 살해한 것이다. 또 하나는, 부친의 여자를 통간하고 천하의 패륜아가 되고 만 것이다(레18:8).
겉으로 보면, 다윗왕이 잘못한 것과 비슷하다. 하나는 간음행위이고 또 하나는 살인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질이 더 나쁘다. 압살롬은 부친의 여자들을 강간한 것이고 또 자신의 형을 살해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압살롬의 반역을 실패로 유도하신다. 그것이 압살롬으로 하여금 책사 아히도벨의 주장을 따르지 아니하고 거짓 투항한 책사 후새의 책략을 따르게 한 것이다(삼하17:14);

아히도벨은 당장 1만 2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가서 다윗왕의 군대를 박살내야 반란이 확실하게 성공한다고 주장한다(삼하17:1-3).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아히도벨의 방안에 찬성하던 압살롬과 신하들이 나중에는 그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삼하17:4-5, 14). 그들은 이상하게도 후새의 방책을 선택하고 만다.
후새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다윗왕이 급히 요단 강을 건너가고 있는데 연도의 백성들이 야유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살겠다고 허둥지둥 도망치는 늙은 다윗왕의 모습을 보고서 백성들이 크게 실망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사실을 크게 홍보하면 다윗왕을 따르는 무리가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
잠시 숨을 쉰 다음에 후새가 장담한다; “그 다음에 전하께서는 천천히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12지파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단 강을 건너가시면 민심을 잃어버린 적들은 전하의 대군을 상대할 수가 없어서 저절로 항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당장 요단 강을 건너가서 격전을 치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도 확실한 승전의 비결입니다”(삼하17:11-13 의역);

참으로 달콤한 후새의 간언이다. 그러나 그 방도를 선택하게 되면 천하의 영웅인 다윗왕이 마하나임에서 세력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게 된다. 그 점을 알고 있는 책사 아히도벨이 다시 간한다; “전하, 후새의 의견을 들으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쉬워 보이지만 망하는 길입니다. 백전노장인 다윗에게 숨을 돌릴 시간을 주게 되면 우리는 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스스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반역의 괴수 압살롬이 달콤한 후새의 말을 듣고 아히도벨의 책략을 물리치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아히도벨이 절망한다. 이제 반란사건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자신은 왕자 압살롬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권토중래하는 다윗왕에게 목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길로로 되돌아가서 천하의 재사인 아히도벨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부르짖는다; “어찌하여 하늘은 이 아히도벨을 내시고 또 후새를 내신 것입니까? 후새만 아니면 나는 압살롬의 스승이 되어 이 나라를 다스렸을 것인데 그것이 한바탕 꿈이 되고 말았군요”;

아히도벨의 분노에 찬 음성이 이어진다; “이제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천하의 죄인 다윗왕이 다시 이 나라의 주인이 되겠군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저는 억울합니다. 그와 같은 죄인의 나라에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 아히도벨은 자신이 여호와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앙앙불락하면서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다(삼하17:23);

요컨대, 아히도벨의 완악한 모습은 먼 훗날 스스로 의인사상에 젖어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눅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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