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도44(작성자; 손진길)
다윗왕이 예루살렘의 시온성으로 천도를 하고나서 8년째가 되는 주전 995년초에 요압 사령관이 암몬을 거의 점령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온다. 그리고 그는 세심하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지금 소장은 암몬의 수도인 랍바의 성을 거의 점령하였습니다. 이제는 궁궐을 포위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들어가면 끝입니다. 하지만 소장은 그렇게 끝을 낼 수가 없습니다”;
요압 사령관이 건의하고 있는 내용이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 예루살렘은 제국입니다. 폐하께서 군대를 몰고 이곳에 오셔서 랍바의 궁궐로 입궐만 하시면 모든 정복사업이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속히 군대를 이끌고 오셔서 암몬의 왕의 항복을 받으십시오”.
요압은 자신이 암몬을 완전히 멸하고 이스라엘제국을 완성했다고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 영광스러운 찬사는 제국의 황제인 다윗왕이 들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왕이 요압의 뜻을 가납하여 그대로 실행한다.
다윗왕이 암몬의 왕을 치고 입궐하여 그의 왕관을 보니 호사스럽기가 대단하다. 화려한 보석을 여럿 박았는데 보석을 둘러싸고 있는 금의 무게가 무려 1달란트나 된다. 1달란트의 무게는 은의 경우 2,000세겔에 해당한다. 1세겔이 11.4g이므로 은 1달란트는 그 중량이 22.8kg이다.
금의 경우에는 그 값어치가 은의 15배이다. 하지만 그 무게에 있어서는 같은 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암몬왕의 왕관의 무게는 보석의 무게를 제하고라도 23kg에 이르는 대단한 중량이다. 그 무거운 왕관을 다윗왕이 한번 써보고 있다(삼하12:30);
다윗왕은 암몬의 백성들을 모두 속국의 백성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제국의 노예로 삼는다. 따라서 암몬족속은 그때부터 나무를 베고 밭을 갈며 장작을 패고 벽돌을 굽는 온갖 중노동에 시달리게 된다(삼하12:31). 그것은 이스라엘제국으로 보아서는 영광이지만 암몬왕국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죽은 개와 같은 곤고한 시대이다;
어쨌든 이스라엘제국은 이제 완성이 되었으며 중동의 패권국이 되었다. 감히 이스라엘제국을 침범할 수 있는 이방인 나라가 주변에서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다윗대왕의 일상이 평안 가운데 물같이 흘러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 신하들과 백성들이 최고의 권력자인 다윗대왕을 바라보는 시선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다윗대왕에 대하여 그 옛날처럼 위대한 인물이라고 더 이상 칭찬하지를 아니하고 있다.
물론 겉으로는 ‘다윗대왕 만세, 이스라엘제국 만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하나같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왕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나보다 못한 인물이다. 그가 권력을 잃게 되면 아무도 존경하지 아니할 것이다”;
다윗왕이 그토록 은밀하게 저지른 그 잘못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완전히 알려지는데 3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 추악한 국왕의 스캔달을 다윗의 아들인 왕자들이 듣게 된다. 그 결과 장남인 암논이 더 이상 부왕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부친 다윗처럼 아주 본능적으로 그리고 제마음대로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자 행동하고 만다.
불행하게도 제국의 세자가 되어야 하는 암논이 마음에 품고 있는 금단의 열매가 바로 이복누이인 다말이다. 공주 다말의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암논은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 결과 상사병이 든다(삼하13:2). 그때 그는 부친 다윗왕에게 부탁하여 다말 공주로 하여금 자신의 병시중을 들게 한다(삼하13:3-7).
그와 같은 모략을 꾸민 자는 다윗의 셋째 형인 시므아의 아들인 간교한 요나답이다(대상2:13, 삼하13:3). 요나답은 세자가 될 암논 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와 같은 흉계를 꾸미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음흉한 꾀인 줄 모르고 순순히 응하고 있는 다윗왕도 그 사건에서 결코 자유스러울 수가 없게 된다.
다말은 궁궐에서만 자라서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공주이다. 부친인 다윗왕의 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복 오라버니인 암논의 방으로 가서 병문안도 하고 병시중도 들어준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는 큰 불행이다. 짐승같이 욕정에 사로잡힌 암논이 그녀를 범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가에서는 있어서는 아니되는 근친상간의 패륜이며 명백한 여호와의 율법의 위반이다(레18:11);
다말이 당한 불행을 그의 친오라비인 왕자 압살롬이 알게 된다(삼하13:20). 하지만 부친인 다윗왕에게 그대로 고할 수가 없다. 왕가의 그 추한 소문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파장을 불러올지 가늠이 되지를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묻어 버리기 위하여 다윗왕이 엉뚱하게 피해자를 해치워버릴 수도 있을 것으로 왕자 압살롬이 걱정하고 있다.
3년전에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서 하룻밤을 지내고 아기가 생기자 도리어 그 남편인 충신 우리야 장군을 모살하고 만 부친 다윗왕이다. 그와 똑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하면 압살롬 자신의 누이만 암살을 당할 것이고 그녀의 오라비인 자신도 왕궁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실제로 왕자 압살롬의 판단과 같이 부친 다윗왕이 영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다. 다윗왕은 장남 암논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정보를 들었지만 잠시 진노만 할 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를 아니하고 있다(삼하13:21-22);
그래서 부친을 못 믿게 된 압살롬이 훗날 기회를 보아 자신의 힘으로 암논 왕자를 해치워버리고자 벼르게 된다. 그렇지만 아직 왕자 압살롬은 별로 권력이 없다. 그의 모친인 마아가가 부친 다윗 때문에 망한 소국 그술의 공주출신이기 때문이다(삼상27:8).
조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28세의 다윗장군이 사울왕에게 쫓기어 블레셋으로 망명하여 작은 성 시글락에서 성주로 지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블레셋의 연맹왕인 아비멜렉에 해당하는 가드왕 아기스가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다윗장군에게 유다지파를 공격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한다(삼상27:12).
다윗장군은 고민한다. 그렇게 동족을 치게 되면 훗날 이스라엘왕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갈릴리 동부에 있는 소국 그술을 치고 전리품을 얻어서 그것을 유다의 것이라고 둘러대고 만다. 그 과정에서 그술의 공주 마아가를 인질로 끌고 와서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이다.
당시 부하장수들이 그술왕국을 초토화시키고 인종청소하자고 했지만 다윗은 그렇게는 하지 아니한다. 그곳의 공주와 귀족의 처녀들을 많이 인질로 삼아서 끌고 오고 그 대신에 달매 왕과 귀족들에게 입단속을 시킨 것이다. 그 결과 훗날 압살롬이 그술 땅의 달매 왕에게 피신하여 지내게 된다(삼하13:37);
다윗은 공주 마아가를 아내로 취하기 전에 벌써 3번이나 결혼하여 아내와 자녀가 있다; 첫째가 사울왕의 딸인 미갈 공주인데 그녀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둘째가 이스르엘 출신인 아히노암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이 장남인 암논이다. 셋째가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고 그녀의 소생이 둘째 왕자인 길르압이다(삼하3:2-3, 대상3:1).
다윗이 아내 아히노암을 얻은 시기는 피신생활을 하고 있던 때인데 그의 나이 25세 무렵이다. 그 이듬해에 장남인 암논을 얻었다고 보면, 암논이 패륜을 저지른 주전 993년은 다윗왕의 나이가 48세이며 암논의 나이는 22세이다. 그리고 다윗이 28세에 공주 마아가를 아내로 취하고 그 다음해인 29세에 삼남인 압살롬을 얻었다고 추정하면 ‘암논의 사건’이 발생한 그때 압살롬 왕자의 나이는 19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미성년자인 압살롬은 아직 힘이 없다. 자신의 친누이이며 미인인 17세의 공주 다말이 큰 불행을 당했지만 그 복수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20세가 되어 대신의 자리에 나아갈 때를 기다린다(삼하8:18). 미남자이며 머리가 좋은 왕자 압살롬이기에 인기가 좋으며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따라서 21세의 왕자 압살롬이 기회를 보아 이복형인 암논을 살해하고 갈릴리 동편에 있는 외가 곧 달매 왕에게로 피신하고 만다(삼하13:23, 28-29, 37);
다윗왕은 그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서 크게 슬퍼한다. 그는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삼하12:10-11, 13:7, 27).
다윗 자신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여사로 저질렀기에 그 비리를 알고 있는 왕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부친인 다윗왕을 믿지도 아니하고 있으며 존경하지도 아니하고 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징벌하고 있는 심판의 내용인 것이다(삼하12:14).
그와 같은 영적인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게 되자 다윗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 다시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이 다윗이 불의한 종이며 죄인입니다. 제가 은밀하게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기에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백주에 범한 죄가 되고 말았습니다”.
흐느낌 가운데 50세의 다윗왕이 계속 부르짖고 있다; “그러한 저의 죄악된 모습을 알게 되자 큰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를 범했으며 이제는 셋째 아들 압살롬이 피의 복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애비를 믿지 못하여 직접 복수를 하고 외가로 도망을 치고 말았으니 그것이 저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렇게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여호와 하나님, 부디 이 다윗을 용서하시고 또한 압살롬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고대 왕국에 있어서는 국왕이 유일한 주권자이다. 왕국은 국왕의 것이며 모든 신민과 재화는 국왕의 소유이다. 그런데 그 국왕인 다윗이 여호와 앞에 십계명을 범한 중죄인이므로 이제는 신하들과 백성들이 다윗왕을 존경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리고 국왕인 다윗의 말도 믿지를 못하고 있다.
다윗의 아들들부터 부친을 불신하고 있는데 누가 다윗왕을 지지해줄 것인가?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다윗왕을 빨리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다윗왕이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죄를 묻지 아니한다고 천명하면서 3년만에 그를 그술에서 돌아오도록 길을 열어준다(삼하13:38, 14:21). 그렇게 압살롬과 화해를 하는 것이 땅에 떨어진 다윗 자신의 권위를 일부나마 되찾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참고로, 어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요압 장군이 그 일을 주선한 것이다(삼하14:1-3, 19-20). 하지만 다윗왕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요압이 두렵다. 그래서 요압과 압살롬이 힘을 합칠까 저어하여 한동안 압살롬을 멀리하고서 지내게 된다(삼하14:24).
그러나 신하와 백성들의 눈초리가 여전히 따갑다. 그들은 여전히 다윗왕이 정치적인 제스처만 취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다윗왕은 2년 후에 못이기는 체 하면서 요압의 주선으로 압살롬을 왕궁으로 불러서 부자간에 화해를 한다(삼하14:32-33).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의 전개를 살펴보면 다윗왕과 압살롬 왕자 그리고 요압 사령관은 모두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순수한 부자관계나 친척관계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비극인 것이다.
일년 후에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내려가서 민심을 모으고 세력을 모으게 되자 많은 대신들과 백성들이 압살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한다(삼하15:7-12). 압살롬을 지지하는 세력이 커지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반란군이 북진한다(삼하16:15);
그 반란에 앞장을 서고 있는 인물이 일찍이 군부대신을 지낸 바가 있는 아히도벨이다. 그는 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헤브론에서 10km 북쪽에 있는 고향 길로에 은거하고 있다가 압살롬 왕자가 도움을 청하자 적극 가담하여 다윗왕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삼하15:12);
천하의 재사인 아히도벨이 압살롬 왕자의 편에 서있으므로 이제 55세가 되어 육신의 힘이 쇠약하고 있는 다윗이 그 반란을 제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요압 사령관과 책사 후새의 의견을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 동편의 군사도시 마하나임으로 가서 세력을 다시 모으고자 한다(삼하15:13-18);
기이하게도 피난길에 나서서 요단강을 건너고자 하는 다윗왕을 도와주는 손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삼하15:18-16:4). 그렇다면, 다윗일행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또한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어떻게 판단하시며 앞으로의 역사를 어떻게 섭리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이제 26세인 왕자 압살롬은 일단 수도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등 반란에 성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다음 압살롬의 행보가 여호와의 눈 밖에 나고 있다. 그는 도대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재사 아히도벨과 왕자 압살롬은 어째서 여호와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삼하16:20-23).
그와 달리 다윗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로 매어 달리고 있다. 내란을 빨리 종식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며 자신의 죄악과 아들 압살롬의 죄악을 모두 용서하여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여호와의 섭리로 역사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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