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OBS교재(손진길 작성)

요한복음 제 44과(18:15-18)(손진길 작성)

손진길 2021. 10. 13. 02:38

요한복음 제 44(18:15-18)(손진길 작성)

|OBS20-44|

 

Q1. 18 15-16절에 등장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인 다른 제자 하나는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큰데 이와 같이 자신을 익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Ø  저자가 자신이 자신의 글속에 등장해야만 하는 경우에 자신의 본명 대신에 자신임을 암시하면서 익명을 내세우는 것은 일종의 동양적인 겸손의 미덕에 해당되고 있는 것임.

Ø  예를 들면, ① 자신의 논문 속에서 자신이 저자인 다른 논문이나 책을 인용해야만 하는 경우에 자신의 이름 대신에 졸저라고 호칭한다거나 ② 성경 속에서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가 자신이 등장하는 대목을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 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 오다가”(14:51)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든가 ③ 아니면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이 자신을 일컬어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21:20),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21:24)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모두 같은 맥락인 것임.

Ø  자신이 대중 앞에서 또는 많은 사람이 읽게 되는 서신서나 글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객관화 또는 3인칭화 시키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익명이지만 자신임을 알 수 있게 표현해 줌으로써 ① 동양적인 겸손의 미덕을 따르는 한편 ② 은근히 독자들에게 숨어 있는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유발시키고 ③ 본명을 바로 사용하는 경우 던져주기 힘든 정보, 특히 자기 과시 같은 것을 슬쩍 그 속에 삽입시키고 있는 것임.

Ø  이로 미루어 보아 이와 같은 표현은 개인적으로 글 쓰는 이의 특권에 속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문화적으로 유대 인들의 정신 사조가 아직 서양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동양적인 셈족의 정신적, 종교적 산물임을 여기서 새삼 알 수 있게 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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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사도 요한의 자기 과시 중 하나인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18:15-16)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Ø  첫째로,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는(18:13)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AD 18-36년이 재임기간인데 AD36년 수리아의 총독인 비델리우스, Vitellius,에 의하여 해직됨)의 장인으로서 산헤드린의 실세였는데(4:6,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에도 그의 머리속에는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현임 가야바 보다도 더 서열이 앞서 있었던 것임. 그 만큼 안나스는 당대의 실력자 가문의 수장이었슴) 그 안나스와 요한이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뜻은 요한의 집안이 갈릴리의 유력한 집안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임.

Ø  둘째로, 고대 사회는 재산의 많고 적음과 학식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치적 대접이 달라지고 있었던 사회이므로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인 세배대는 많은 일꾼을 거느린 어업 종사자이므로(1:19-21) 학식보다는 재산이 많았던 관계로(갈릴리 가버나움의 선주 집안의 가장으로서) 예루살렘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인 대제사장 안나스와도 평소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임.

Ø  이와 같은 부자 세배대와 예수님 집안과의 관계는 사도 요한이 공관복음서(15:40-41, 살로메, 20:20, 27:56,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8:1-3, 23:55, 24:10,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온 여자들)의 기록과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고 기록함으로써 잘 드러나고 있슴. 왜냐 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 집안과 그 친척들에게 신경을 먼저 쓰고서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데 은연중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이모라는 사실을 과시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예수님이 자신의 모친 마리아의 장래 봉양을 요한을 통하여 요한 집안에 맡길 수 있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① 이모 집안이 부자였으며 ② 공생애 기간중 물심양면으로 이모가 자신을 도와주었고(27:55-56, 8:3) ③ 이종 동생인 요한을 자신의 친동생들 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13:23, 21:20)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임.

Ø  위의 기록, ‘19:25’에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은 다음과 같슴; ① 이모 다음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그 다음 서열로 등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글로바가 사도 요한이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이 큰 것임. 만약 글로바가 요한 집안과도 가까운 사이, 즉 예수님의 외척이었으면 요한이 그대로 그 관계를 명기하였겠지만 그러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아 이 관계는 예수님의 친가쪽 친척일 가능성이 큰 것임. ②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가운데 글로바를 제일 먼저 만나고 있는 대목을(24:18) 참고해보면 글로바는 예수님으로부터 원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위치인 친척으로서 그의 삼촌일 가능성이 큰 것임. 따라서 속설로서는 야고보 다음으로 예루살렘 총회장을 지낸 예수님의 사촌 동생인 시므온의 아버지가 글로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 ③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먼 친척이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모친, 이모, 숙모 등과 동행할 수 있을 정도의 막역한 사이로 등장하고 있는 것임. 사도 요한이 무의식적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를 이와 같이 아주 가까운 친척처럼 느끼고 있다는 것은 마리아와 예수님 또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과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표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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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도 관찰자가 누구이냐에 따라서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하고 있으므로 글에 있어서 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며 일종의 과학철학(scientific philosophy)적인 용어이지만 간주관성’(間主觀性, 관찰자나 실험자의 주관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는 객관성)을 학문적으로도 용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 점을 두드러지게 엿볼 수 있는 사도 요한의 기록은 이 대목에서(‘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18:15-18)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Ø  문 지키는 여종”(18:16-17)에게 요한이 부탁하여 베드로를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 왔는데 바로 그 여종이 베드로가 잡혀온 예수의 제자임을 알아 보고서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질문했다는 것임(18:17).

Ø  한 사람의 비자 또는 여종(26:69, 14:66, 22:56)이 아니라 사도 요한은 문 지키는 여종”(18:16-17)이라고 그 직책을 명기하고 있으며 그 여종과 자신과의 친분까지 묘사하고 있는 것임(대제사장과도 잘 알고 그 여종과도 안면이 있었기에 베드로를 대제사장 집 뜰 안으로, 즉 문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임).

Ø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렸는데 그 묘사도 공관복음서에서는 하나같이 그 종의 이름이 없지만(26:51, 14:47, 22;50-51) 대제사장 집안 일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요한은 그 종의 이름이 말고’(18:10)라고 친절하게 명기하고 있는 것임.

Ø  이와 관련하여 의사 누가는 특히 그 혼자만이 예수님이 종의 귀를 친절하게도 손으로 만져서 낫게 해주셨다고 특기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누가의 의사로서의 직업적인 관찰력 그리고 인간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누가의 관심이 매우 지대하였다는 사실까지 아울러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임.

Ø  이것이 과학적인 객관적 기록 가운데에서도 엿볼 수 있는 주관성의 흔적들인 것이며 여기서부터 더 많은 개인적인 성향과 상호 관계를 시사해주는 유용한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는 것임. 성경 공부도 이 점에 유의할 때, 살아 있는 인간 관계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호흡과 맥박 소리 그리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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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문 지키는 여종이 열두 사도 가운데 그 녀가 잘 아는 요한을 지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잘 모르는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지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Ø  여종의 관심사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였기 때문임.

Ø  정치적으로 대제사장의 반대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예수의 열두 사도가 누구 누구인가 하는 정보가 여종에게 주요 관심사가 아닌 것임. 그 녀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그 녀의 동료인 용감한 남자 하인 말고의 귀를 칼로 베어버린 베드로라는 인물이 괘씸하고 인간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가 되어버린 것임. 그래서 그 녀는 베드로의 인상 착의를 전해 듣고 마음속에 몽타쥬(용모파기)를 그려두고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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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베드로가 스승이신 예수님과 사제지간임을 부인한(18:17) 이유는 무엇인가?

 

Ø  예수와 사제지간으로 또한 말고의 귀를 자른 테러리스트로 체포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임.

Ø  대제사장의 부하와 맞설 정도로 용감무쌍했던 베드로가 이제 목숨이 아까와서 그 장면을 회피하고 있는데 일찌기 이와 같은 경우는 모세의 경우에서도(2:11-15) 잘 엿볼 수 있는 것임.

Ø  그렇지만 그들이 단순하게 본능적으로 목숨에 그토록 연연해서 그와 같이 도망친 것은 아닐 것임. 왜냐 하면, 두 사람 모두 민족을 구원하는 메시야 사상에 밀착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신봉하던 이념 또는 스승이 그만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리는 현장을 목격하고나서 이제는 좌절감과 무력함에 젖어들어 구태여 배반당한 현실에 목숨을 걸만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것임. 그와 같은 인간의 진실과 진심을 통찰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원망없이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 오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임(21:15-20,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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