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26(작성자; 손진길)
5. 일본에서 얻은 지식과 새로운 사업
선더말 아재는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한 다음에 며칠간 휴식을 취하면서 깊은 생각을 한다. 1965년 가을에 그가 20년만에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얻은 지식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다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그가 동경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을 때에 의형인 배인근과 안춘근이 그에게 해준 경제관계 이야기이다.
두사람은 1945년 8월에 아시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지배와 그 영향권 아래에서 일본이 20년간 지내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난 1950년부터 일본의 경제가 다시 회복이 되고 1955년부터는 고도성장의 열매를 얻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들은 한국으로 떠나는 의동생 선더말 아재 손수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경제적인 사실을 명심하라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전후에 미국은 맥아더 사령관을 통하여 일본을 지배하면서 일본의 방위산업을 없애고 민생산업을 재건하되 그 수준을 일본인들이 겨우 먹고사는 정도로 제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정책이 폐기가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외생적인 요인이 두가지 발생했기 때문이다; (1) 첫째, 1949년 12월에 마오쩌둥의 공산군이 장제스의 국민군을 모두 대만으로 내쫓고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말았다;
(2) 둘째,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북한의 김일성 공산정권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을 집어삼키겠다고 남침을 개시한 것이다;
극동에서 공산진영이 크게 팽창하자 미국은 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군사적인 대응에 나섰다. 일본의 방위산업을 다시 육성하여 병참을 맡도록 하고 미국은 유엔군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3년간 지속이 된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군수품 수출로 그들의 1년 예산과 비교할 때 그 몇배나 되는 이익을 얻게 된다;
그 수익으로 1955년부터 일본정부는 자체적으로 고도경제성장 계획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1955년부터 196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고도경제성장 정책이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여건이 일본에게 극히 유리했기 때문이다. 소위 ‘3저현상’이라고 하는 환경적인 요인이 그 기간 동안에 지속이 된 것이다.
일본정부는 차관을 더 얻어서 공장을 많이 세우고 수출을 크게 늘리는 것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한 일본의 필요를 채워주는 환경적인 요인이 다음과 같이 기가 막히게 맞아 들어가고 있다;
(1) 첫째, 싼 이자로 차관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국제적인 저금리 현상이 지속이 된 것이다.
(2) 둘째, 공장을 싸게 돌릴 수 있도록 석유와 원자재 값이 싸야만 한다. 때마침 국제적으로 석유와 원자재 시장이 저가로 안정기조이다.
(3) 셋째, 수출시장이 좋고 수출로 얻은 외화가 강세여야 한다. 국제적으로 경제가 성장기이므로 일본의 제품이 잘 팔리고 있다. 환율에 있어서도 엔화의 약세가 계속 지속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정책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셋째로, 세계 제1차대전이 1919년에 끝나자 미국과 유럽에서는 몇 년 후에 대공황을 경험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는 유럽전쟁에 병참을 담당하였는데 그만 종전으로 그 시장이 사라진 것이다. 방위산업이 중단이 되고 군에 동원이 되었던 군인들이 민간인으로 돌아오게 되자 실업률의 증대가 심각하다;
생산공장은 조업단축과 폐업에 휩싸인다. 공포를 느낄 만한 불황이 찾아온 것이다.
그 사정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으로 파괴가 되어버린 경제를 다시 소생시킬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적인 불황의 한가운데에서 독일과 이태리에서는 정치적인 극단주의자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서 군사적인 침략전쟁으로 자신들의 국내문제를 손쉽게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교훈을 미국이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크게 보아 두가지의 정책을 추진한다. 그 결과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세계적인 불황이 재발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혜택을 일본이 고도경제성장 정책으로 누리고 있다고 하겠다. 세계의 패권국이 된 미국이 전후에 추진하고 있는 두가지 정책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
(1) 첫째, 방위산업공장을 계속 가동하려고 한다. 그 방법이 동구권과 극동으로 갑자기 팽창하고 있는 소련과 공산진영의 세력을 군사적으로 봉쇄하는 정책의 추진이다. 때마침 중국이 공산화가 되고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북한이 남침하고 있으므로 미국은 복원계획을 중지하고 다시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전쟁에 임하는 것이다.
(2) 둘째, 미국이 앞장을 서서 자유자본주의 진영을 경제적으로 이끌고자 한다. 서구는 물론 극동의 일본과 한국에 원조와 투자를 병행하고 어느 정도 경제가 회복이 되면 투자분에 대하여 큰 과실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조적으로 미국의 방위비를 크게 부담하도록 만든다;
미국은 세계적인 패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1) 첫째, 무역과 해외결재에 있어서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하게 하고, (2) 둘째, 원자재의 구입에 있어서 미국의 선물시장을 이용하도록 하며, (3) 셋째,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는 물론 수출입 상품의 해상 수송로를 아예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경에서 배인근 형과 안춘근 형은 선더말 아재에게 전후 미국이 주도하는 그러한 세계적인 경제성장정책이 계속 지속이 되어 아무쪼록 한국의 제3공화국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착실한 성과를 얻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비록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부모가 모두 조선사람이기에 조국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그 두 형과 만났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수산물 냉동과 냉장의 건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를 거듭 생각하고 있다. 당장은 한번 시간을 내어 서울에 가서 냉동기계를 설치하고 있는 회사 ‘조선 냉동’의 기술자들을 만나보고자 한다. 그리고 항구도시인 부산으로 가서 수산물 냉동냉장공장이 어떻게 건설이 되어 운영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이 자신의 재력으로 가능하다고 하면 경주에 있는 ‘생선도가’를 인수하고 육성하는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그 일은 급히 처리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시장조사부터 해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선더말 아재는 그 모든 일을 다음해인 1966년부터 구체화해보고자 한다.
1965년 겨울에 손수석이 서울을 방문한다. 서울역에서 남쪽으로 진행하여 남영동 근처에 있는 회사 ‘조선 냉동’을 찾아간다;
사장과 기술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회사로 보인다. 인사를 나눈 다음 경주에서 왔다고 했더니 대뜸 ‘경주얼음공장’을 아느냐고 묻는다.
선더말 아재는 경주의 부자인 한사장이 서천내 가까이에 ‘얼음공장’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대답한다; “경주 서천내에 세우고 있는 얼음공장을 말씀하시는 군요. 일전에 시내에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자 조선 냉동의 사장과 공장장이 함께 말한다; “저희들이 그 공장의 설계에 관여를 했습니다. 그 얼음공장의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경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저희들이 관여한 급냉 시설이지요”.
손수석이 말한다; “저는 그보다 큰 규모의 냉동냉장 및 제빙공장을 세울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경주와 월성군에 살고 있는 약 30만명의 인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규모의 얼음을 만들 수 있는 그러한 공장을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조선 냉동’에서는 그 정도의 공장을 지은 적이 있습니까?”.
사장과 공장장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사장이 먼저 대답한다; “손사장님은 혹시 부산에 있는 수산물 냉동 및 제빙공장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희들은 그 정도의 냉동공장까지 짓고 있습니다. 그러니 경주와 월성 정도의 지역을 커버하는 냉동공장 정도는 능히 지을 수가 있지요…”;
선더말 아재가 기술적인 문제는 어렵지가 않다고 하는 의미로 알아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주와 월성의 인구가 먹고 살 수 있는 수산물을 냉동 냉장하고 그들에게 얼음을 제공하는 그러한 공장을 짓는다고 하면 그 예산이 어느 정도 들까요?”. 사장이 웃으면서 말한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은행 융자를 받아야 하는데 대략 3억원 정도는 예상을 하셔야 할 겁니다”.
손수석이 얼른 머리속으로 계산을 해본다; “요즈음 경주시내의 기와집이 한 채에 100만원 정도이다. 그렇다면 기와집 300채를 팔아야 그 공장 하나를 지을 수가 있겠구나. 이거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내가 가진 재산의 거의 절반을 퍼부어야 한다는 말이구나”.
그렇게 판단을 한 선더말 아재는 좀 더 시간을 두고서 숙고를 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과 명함을 교환한 다음에 오후 늦게 서울역에서 경주로 오는 열차를 탄다. 다음날이 되자 매형 이도성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황오동 집으로 찾아온다. 어쩐 일일까?하여 손수석이 묻는다; “매형께서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이도성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처남, 내가 그동안 담배포를 운영해서 나름대로 돈을 조금 모았어. 그래서 다른 사업을 해볼까 하여 물색을 하고 있는 중이야. 마침 성건동 변두리에 있는 엿공장이 매물로 나와 있더군. 그래서 나 혼자 한번 가서 둘러보았는데 그 매물이 괜찮아 보여…”;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말한다; “매형께서 그 연세에 좁은 담배포에 갇혀 계시니 답답하셨던 모양입니다. 어디 저와 함께 그 엿공장을 보러 가시지요. 제가 한번 전망이 어떤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날 두사람이 가서 살펴본 그 엿공장이 벌이가 괜찮아 보인다;
엿장수들이 20여명 출입을 하고 있는데 엿공장에서는 외상으로 그들에게 엿을 제공하고 그들이 모아서 오는 고물을 사들이고 있다;
엿공장을 오래 경영한 주인이 나이가 많아지자 처분을 하려고 하는 매물이다. 가정집도 딸려 있어서 그곳에서 한가족이 생활도 가능해 보인다. 주인에게 매매가를 알아보니 직접 경영하실 의향이시면 조금 싸게 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손수석은 매형의 담배포에 와서 누나와 더불어 상의한다. 이도성의 부인인 손해선이 가능하면 자신도 엿공장을 인수하여 한번 경영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인수대금 가운데 모자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더말 아재가 투자를 하기로 하고 이틀 후에 계약을 한다. 이도성이 운영하고 있는 담배포는 매물로 내놓았더니 생각보다 좋은 값에 조기에 팔린다. 목이 좋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 결과 1965년이 지나가기 전에 이도성 가족이 성건동 변두리 엿공장으로 이사한다. 그렇게 사업체를 넓혀가고 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선더말 아재 손수석의 마음이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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