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손진길 소설)

선더말 아재20(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8. 22:35

선더말 아재20(작성자; 손진길)

 

1965년 5월에 차남 손진길이 선더말 아재 손수석에게 문화중학교에서 보내는 가정통지문을 하나 가지고 온다. 그 내용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정기적인 학력평가인 중간고사에서 손진길 학생이 평균 92점의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문화중학교에서는 평균 90점 이상을 취득하는 우수한 학생에 대해서는 그 다음 학기 등록금과 수업료 일체를 면제하는 장학생 혜택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7월달에 시행이 되는 기말고사에서 다시 한번 90점 이상을 얻게 되면 손진길 학생은 장학생으로 확정이 되어 1학년 2학기에는 등록금과 수업료가 일체 면제라는 것이다;

차남 손진길은 그 가정통지문을 부친 손수석에게 보이면서 얼른 도장을 찍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부친의 안색을 전혀 살피지 않고 얼굴을 돌리고 있다. 선더말 아재는 아들이 화가 많이 나 있다고 느끼고 있다. 아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두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철저하게 자신을 무시하였으니 그 성적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것이니 두고 보라는 것이다.

그러한 차남 손진길의 불편한 속내를 넉넉하게 짐작하면서도 선더말 아재는 먼저 아들의 약을 올린다; “허허, 공부에는 영 맹탕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문화중학교에서는 꽤 성적이 좋구만. 그래 그곳에서라도 한번 열심히 해봐. 혹시 3년후에 대구의 1차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나?...”.

그 말을 들은 손진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아니하고 그저 가정통지문에 도장을 받아 가지고 제 방으로 건너가고 만다. 일체 부친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경주에서도 그 존재감이 크게 없는 문화중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참으로 수치스러운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에 등교를 할 때에는 가급적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지 아니하는 길로 그것도 모자를 꾹 눌러쓰고서 잰 걸음으로 지나치고 만다. 혹시 황남국민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우려해서이다. 그렇지만 문화중학교를 가자면 황오동에서 성건동으로 가기 전에 반드시 큰 길을 하나 건너야 한다. 그 큰길이 여학생들의 등교길이다.

그 큰 길을 건너가야만 한다는 것이 손진길의 자존심을 엄청 상하게 하고 있다. 국민학교 때는 그래도 공부를 잘한다고 동급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인데 이제는 경주중학교가 아닌 문화중학교의 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등교와 하교 때에는 그 큰 길을 아주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고자 그는 본능적으로 애를 쓰고 있다.

그 결과 키도 별로 크지 아니한 중학생 손진길의 발걸음이 자기도 모르게 아주 빨라지고 만다. 중학시절 3년 동안에 빨라진 발걸음이 평생 고쳐지지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소년 시절의 시련과 그 극복의 역사는 평생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마는 모양이다.

그해 1965년 6월이 되자 그동안 선더말 아재의 집에서 안방마님 고복수의 부엌일을 거들어 주던 호야가 시집을 갈 준비를 한다고 천북 화산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간다. 그 대신에 그 마을에서 ‘분자’가 온다. 그녀는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왔는데 15살이다. 분자는 별로 말수가 없고 조용하게 부엌일을 배워서 잘한다;

그리고 기타 집안일을 돕는 것은 선더말 아재가 차남인 손진길에게 시킨다. 그는 부친 손수석이 퍼서 담아 놓은 대변통을 리어카에 싣고서 첨성대에 살고 있는 삼촌 댁으로 간다. 그곳에서 퇴비를 만드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변을 모아서 퇴비에 부어 거름을 만들어 비료 대신 사용하는 시절이므로 시내의 변소를 푸는 것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큰 이권이다. 그래서 서로 돈을 조금 주고서 변소를 퍼주겠다고들 한다;

당시만 해도 화장실을 ‘뒷간’, 또는 ‘측간’이라고 하여 가옥의 뒤뜰에 두고 있던 시절이다. 수세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달에 한번쯤 긴 막대에 매단 바가지로 변소의 아래칸에 모여 있는 대변을 퍼서 나무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통에 담아야만 한다;

 그것을 밭에 가지고 가서 한쪽에 설치해 놓은 퇴비에 붓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름이 비료 대신 밭에서 사용이 된다.

그러한 퇴비를 만들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대로 밭에다 거름으로 대변을 뿌리게 되면 그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거름을 만들 풀이 없거나 시간이 없을 때에는 부득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 대변에서 죽지 아니한 채독벌레가 밭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신발을 신지 아니하고 밭에서 일하게 되면 기생충인 채독벌레가 사람에게 들어와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중학교 1학년에 불과한 차남 손진길에게 선더말 아재가 시키는 일이 두가지 더 있다; 하나는, 가축시장이 열리게 되면 천북 화산에서 소작농이 몰고온 소를 그곳으로 몰고 가라는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선더말 아재가 벌써 자전거로 도착해 있다. 그 일을 마친 다음에 손진길은 학교에 가야 한다;

또 하나는, 중요한 서류를 선더말 아재는  차남 손진길의 손을 통하여 전달하게 한다. 차남이 등교를 하는 길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단골로 이용하고 있는 사법서사의 사무실이 있다. 그러므로 선더말 아재가 아들에게 서류봉투를 내밀면서 지시한다; “길이 너는 등교길에 이 서류를 ‘김경암 사법서사’의 사무실에 전달해라. 중요한 서류이니 잃어버리면 안된다”. 손진길은 얼른 그 서류를 책가방에 넣는다.

그렇게 몇 번 심부름을 하였기에 손진길은 그 사무실의 사람들을 대충 알고 있다. 그 사무실의 주인인 사법서사 ‘김경암’은 부친 선더말 아재보다 연상이고 나머지 직원들은 젊다;

한번은 일찍 서류를 전달하고 얼른 문간으로 나오고 있는데 뒤에서 서기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학생의 부친 손사장은 재산이 많아서 소꼬리만 하더라도 한 트럭이 넘는다고 하는 구만. 실로 대단한 알부자야”.

그 말을 들은 손진길은 속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 어디다 사용하나?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걸. 나는 내 길을 갈 것이고 반드시 자수성가를 하여 내 나름대로 떳떳하게  살 거야. 아버지가 한 그 자수성가를 내가 못할 줄 알고. 어림도 없지…”. 참으로 속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악바리 근성을 지니고 있는 선더말 아재의 차남이다.

그러한 시기에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야당과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와 수교를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19년 전까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온갖 착취를 자행한 원수의 나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과 정상적인 국교관계를 맺을 수가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제국이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군사력으로 조선과 만주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고 중국대륙의 동해안 주요도시까지 장악하여 침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동남아와 서남아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까지 점령했다;

그런데 가장 식민지 피해를 오래도록 많이 본 한국이 도대체 어떤 배상을 받고서 일본의 침략주의 시대를  용서해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1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에게 빨리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런데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의 수교를 서두르고 있다. 그 명분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계속 추진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목말라 있는 국민들은 충분한 보상과 배상을 받는다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선더말 아재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러나 젊은 대학생들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다. 역사를 잊어버리고 돈을 받고 쉽게 용서를 해주는 것은 일제의 압제 아래 희생을 당한 선조들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14년간이나 끌어온 한일간의 관계정상화와 수교가 1965년 6월 22일에 양국 외무장관이 기본협정에 서명을 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만다;

 그 내용이 워낙 중요하므로 참고로 여기에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일 기본조약 -------------------------------------------------------------------------------------

한일 기본조약은 7개조로 구성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 이에 부속된 4개의 협정 25개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조약의 부속협정으로는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있다.

기본조약에 의하여 - 양국은 외교, 영사관계를 개설하고 한일합병 이전에 양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은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 있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특히 부속협정인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후에 일제 강점하 피해자 보상과 위안부 보상 문제 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일청구권협정-----------------------------------------------------------------------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김종필과 오히라의 메모를 바탕으로 재산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역시 조인되었다. 보통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고 부른다.

협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조선에 투자한 자본과 일본인의 개별 재산 모두를 포기하고, 3 달러의 무상 자금과 2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에 합의했다.

일본은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중적인 자세를 보였는데, 한국에 대해서는 이로써 전쟁 전의 역사를 청산하는 배상금의 성격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경제협력의 일환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한국은 일본의 개인 보상을 인프라 투자에 유용한 것을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배상 청구의 견해 차이 등으로 한일 관계에 화근을 남기게 된다;

 

일찍이 경찰서 정보계장으로 오래 일한 선더말 아재는 한일수교의 이유와 그 핵심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간단하게 다음 세가지이다;

첫째로, 3공화국이 조국의 산업근대화를 위하여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자본과 기술이다. 그 두가지를 얻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구미지역에서의 지원이 미약하다. 따라서 일본과 관계개선을 하면서 과거 침략에 대한 배상금을 최대한 받아서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으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일수교의 핵심은 청구권 액수인 것이다.

둘째로,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을 보내어 비밀리에 일본의 외상인 오히라와 청구권 액수를 타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무상으로 3억불, 유상으로 2억불, 은행차관으로 1억불로 합의를 하고 메모를 남긴다. 애초에 한국측에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배상금을 달라고 하면서 높은 금액을 청구했지만 일본측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에 일본은 불법적인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정당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데 금액이 청구권명목의 7천만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타의 금액은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의미 또는 경제자립을 원조하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셋째로, 일제에 의하여 징용에 끌려가거나 정신대로 끌려가서 인생이 망가진 한국의 피해자들이 개인적으로 받아야 하는 손해배상에 대하여 일본은 한국정부가 일괄적으로 돈을 받아가고 청구권문제를 종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문제는 개인과 일본의 회사 사이의 문제이므로 국가나 정부가 조약으로 일괄 타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더말 아재는 분명히 훗날 큰 문제로 불거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선더말 아재가 그쯤 이해하고서 자신의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해 가을에 중앙정보부에 근무하고 있는 경주지역의 책임자가 사람을 보내어 은밀하게 만나자고 한다. 그가 원하는 장소 안가로 찾아갔더니 대뜸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다; “손 사장님께서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좀  수고해 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상부로부터 은밀하게 시달이 된 내용을 그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책임자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한다; “국가가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돈으로는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에 살고 있는 동포들 가운데 부자들이 상당수 있으므로 차제에 그들을 은밀하게 접촉하여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투자하도록 해주십시오. 우리 지역에서는 일본에서 오래 살아 보신 경험이 있는 손 사장님을 저희들이 적격자로 중앙에 추천했습니다. 그러니 애국 애족하는 마음으로 부디 내밀하게 좀 도와주십시오. 잔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게 부탁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듣고 보니 그것은 선더말 아재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안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아직 한번도 일본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일수교가 되었으니 정식으로 여권을 발부 받아서 일본을 방문할 수가 있습니까?”;

그 말을 듣자 책임자가 공손하게 대답을 한다; “네, 손사장님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친지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하여 여권을 발부 받아 일본입국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아직 입국이 안됩니다. 일본정부에서 훗날 방문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손수석이 묻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입국을 못하고 돈만 가지고 와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 책임자가 머리를 숙이면서 말한다; “그러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안가에서 비밀리에 손사장님을 만나 뵙고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일본을 방문하셔서 친구분을 만나시더라도 일체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만약 현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경우에는 재일교포의 돈을 가지고 오는 루트가 모두 차단이 됩니다. 경찰생활을 오래하신 손사장님이시기에 저희들이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보계장 출신인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염려말라고 하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리고 그는 이번 기회에 일본에 살고 있는 선배 손철호와 일가인 손진동을 만나보고자 한다. 그들은 1945년부터 그곳에서 20년동안 어떠한 인생을 살아오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하여 일본의 경제가 부흥했다고 하는데 과연 어느 정도로 발전이 되고 있는지도 한번 자신의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다. 그래서 그 책임자에게 자신이 일본을 방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책임자가 엄청 좋아하면서 빠른 시일내로 여권과 비행기표를 구해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행동하실 요령에 대해서는 별도로 훗날 다시 상세하게 말씀을 드리겠다고 한다. 과연 선더말 아재는 귀국한지 20년만에 다시 일본 땅을 밟을 수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