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44(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3. 20:11

봉천 할매44(작성자; 손진길)

 

1949년 3월 1일부로 손수석이 순경에서 한 계급 진급하여 경장이 된다. 그리고 보직이 ‘안강지서’ 차석으로 발령이 난다. 그곳에는 지서장과 차석의 관사가 있어 지내기가 편리하다. 아들이 경찰에 투신한지 1년 반이 되지도 아니하여 진급을 했다고 봉천 할매 정애라가 좋아한다.

봉천 할매는 이제 6개월이 된 손자 손진목도 볼 겸 안강으로 와서 한동안 아들 내외의 관사에 머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식사를 마친 아들 손수석에게 물어본다; “수석아,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가 수립이 된 지 이제 7개월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여순반란사건’도 있고 하여 참으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그런데 수석이 너는 이승만 대통령의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손수석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제가 보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미외교에는 도가 튼 사람 같아요. 미군정이 끝나고 물러갔는데 한국의 논밭에서 여전히 작황이 좋지가 못하자 얼른 미국에 외교를 잘하여 군정 당시보다 더 많은 양식을 지원받아 오잖아요. 그리고 미국의 교계에 교섭하여 구제품도 더 많이 얻어 오고 있고요. 그 점에서는 이 대통령이 탁월한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가 말한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권이 북한과 소련에 대해서는 어떻게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이냐?”. 손수석은 모친이 어째서 그러한 질문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그리고 대답하기도 쉽지 아니하다.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판단을 말한다; “제가 보기에는 일제강점기에 똑같이 항일투쟁을 했다고 하지만 이승만과 김일성 두사람은 그 분야가 확연하게 다른 것 같아요. 이 대통령이 주로 미국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면, 김일성은 만주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했잖아요. 그러니 군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더 전문가이지요. 반면에 이 대통령은 그렇지가 못해요”.

봉천 할매가 예리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권이 대북안보에 있어서는 취약하겠구나. 과거 소련의 스탈린이 1945년 8월에 삽시간에 1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남침을 함으로써 만주와 북한 땅을 빠르게 모두 점령한 이력이 있는데 그러한 전술로 스탈린이 다시 김일성을 앞장세워서 남침을 개시한다면 이승만 정권이 쉽게 막지를 못하겠구나. 나는 그것이 우려가 된다”.

손수석은 모친의 그 말씀을 듣고서야 그러한 견해가 오예은 간호사와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임을 눈치챈다. 그것은 그 정보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미국의 견해일 것이다. 그것을 오하원 선교사가 미국 친구들에게서 듣고서 딸에게 말해주었기에 결국은 그 절친인 봉천 할매가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손수석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벌써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므로 노회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음모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를 못하다. 그 대신에 미국의 첩보와 정보망이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 준비에 어떻게 박차를 가하고 있는지를 벌써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국무성과 국방성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봉천 할매와 손수석은 ‘안강지서’의 사택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점이 상당히 궁금하다.

그렇지만 시골 지서의 차석인 손수석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고급정보에 접근을 할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공산당 세력이 산지에서 마을로 내려오게 되면 그것을 사전에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향의 식구와 일가들이 밥을 굶지는 않는지 그것을 점검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수석이 모친에게 물어본다; “어머니, 작년 가을에 추수를 해보니 그 수확이 어땠어요? 부족한 양식은 어떻게 보충을 하셨어요?”. 봉천 할매가 ‘호호’라고 웃으면서 답을 한다; “수석아. 네가 고향을 떠나서 공직에 나가 있으니 좋은 점이 하나 있더라. 너븐들 일가들이 이제는 가주가 아니 계시니 잘못하면 굶겠다고들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부지런하게 농사를 짓더라. 그 결과 작년에는 처음으로 가뭄을 극복하고 평년작 수확을 기록했어...”.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묻는다; “평년작 정도의 수확이라면 여전히 양식이 부족한데요. 일가들이 어떻게 부족한 양식을 구하고 있나요?”. 봉천 할매가 말한다; “글쎄, 그것이 말이지. 수석이 네가 고향에 없으니 모두를 면사무소에 몰려가서 구휼미를 달라고 떼를 쓰더구나. 그래서 그런지 미국에서 들어온 밀가루를 얼마나 많이 타오는지 몰라. 그것으로 수제비와 칼국수를 끓어 먹고서 잘 지내고 있다. 모두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배급량이 더 많아졌다고 칭송이 자자하단다”.

그것 참 다행이다. 이제 손수석은 고향 일가들의 생계를 돌보는 일에서 한시름을 놓게 된다. 자신이 없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 한국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이승만 정권은 대미로비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도 잉여농산물을 같은 값이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대한민국에 최우선적으로 제공하고자 한다;

애초에 미국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세력의 확장을 아시아에서 막는 보류로서의 한반도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9일부터 대규모의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순식간에 만주와 내몽고 그리고 한반도로 밀려 들어오자 놀란 미국이 한반도 38도선 이남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8월14일 밤에 급히 타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덕택에 소련군이 8월 22일 38선 이북에서 남진을 멈추고 9월에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온다. 남한에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은 비로소 소련의 세력을 막는 교두보로서 한반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따라서 가능하면 한반도 전체에 친미주의 정권을 한국민의 동의를 얻어서 세우려고 무진장 노력한 것이다;

그러한 미국의 시도는 번번이 소련의 군정과 그들의 사주를 받고 있는 김일성의 반대로 좌절이 되고 만다. 얼마나 미국이 급했으면 유엔을 동원하여 남한에서 만이라도 친미정권을 세우려고 그토록 노력을 했겠는가? 그 점을 손수석은 이제서야 정확하게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정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끝까지 식량원조를 해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한 판단이 서자 손수석이 비로소 고향의 일가들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털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안강지서’의 차석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관내순찰에 철저를 기하고 말단 순경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1949년 가을에 경주경찰서장이 손수석을 본서로 부른다. 그리고 서장실에서 개인적으로 말을 한다; “손경장의 이력서를 내가 보았더니 일본 동경에서 청년학교를 수료하고 북해도 석탄회사에서 경리로 오래 근무한 적이 있더구만. 그 정도의 학력과 경력이면 순경이 아니라 간부인 경위로 경찰에 투신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어째서 말단 순경으로 들어왔는가?”.

손수석이 깜짝 놀란다. 서장이 자신의 이력서를 일부러 보았다고 하니 그것은 자신을 본서로 불러들이고자 하는 생각이다. 손수석 자신은 본서보다는 역시 일선기관인 지서근무가 오히려 자유롭고 편하다. 그래서 신중하게 답변한다; “제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근무를 한 것은 전부 일본말로 한 것이니 한국에서 민주경찰로 일하는데 있어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지서의 차석으로 현장 근무하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달리 불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서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내가 자네를 오래 본서에 붙들어 두지는 않을 것이니 한 반년만 경무과에서 경리일을 좀 도와 주게나. 그 계통에 실무경력들이 전혀 없어서 본서의 살림살이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네. 경리실무를 순경과 경장들에게 좀 가르쳐주게. 부탁하네…”.

그것은 말이 부탁이지 사실은 명령이다. 그래서 손수석이 대답한다; “서장님, 잘 알겠습니다. 인사명령이 나는 대로 바로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결과 손수석 경장은 1949년 가을부터 1950년 봄까지 본서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서장은 상당히 신의가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말한 반년이 지나자 1950년 봄에 손수석을 ‘천북지서’로 발령을 내준다. 손수석은 자신이 모친을 통하여 사 놓은 전답이 그곳에 있기에 신이 나서 지서근무를 하게 된다;

1950년 여름이 되자 더위가 보통이 아니다. 특히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엄청난 수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대대적으로 남침을 감행한다;

 이승만 정부가 적에게 수도권을 내주고 대전을 임시수도로 삼고서 피난생활을 하게 된다. 수도권의 시민들은 공산군이 들어오게 되면 과거 북한에서처럼 지주와 부자들이 큰 봉변을 당한다고 생각하여 남부여대로 일시에 남쪽으로 피난을 떠난다;

 

그 결과 엄청난 피난민이 대구와 경주 그리고 부산지역으로 몰려온다. 갑자기 인구가 두배 이상 늘어나게 되니 보통 난리가 아니다. 뜨거운 여름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바깥에서도 비만 피하면 잠을 잘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제 부산으로 후퇴하여 임시수도로 삼고서 미국의 지원을 애원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참전이 예상보다 빠르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이 미군과 유엔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들어와서 낙동강 방어선을 신속하게 구축한 것이다. 북한정권의 수령인 김일성은 빨리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그것이 쉽지가 않다;

그렇게 일진일퇴를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김일성의 군부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회심의 일격을 맞게 된다. 1950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기 때문이다;

 9월 28일에는 유엔군과 한국군이 수도인 서울을 수복한다;

 그리고 38도선을 횡으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한다. 남한 깊숙이 들어온 북한군은 졸지에 보급이 끊어져서 맥을 쓰지를 못하고 밤중에 산을 타고서 퇴각하기에 바쁘다.

포항까지 인민군이 들어오자 경주 월성지역 사수를 위하여 국군과 경찰이 총력을 기울인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학도병을 모집한다;

 그것도 부족하여 주민대장을 보고서 청년은 물론 청소년까지 끌어와서 급히 군사훈련을 시키고 전선에 배치하고 있다. 군에서도 소대장이 수많이 전사를 하게 되자 단기과정으로 장교를 양성하고 있다.

경주를 사수하기 위하여 북천내에 참호를 수없이 파고 국군이 매복을 한다. 마침내 천북 맞은편 안강이 가까운 지역의 ‘비학산’에서 고지전이 발생한다;

 그곳을 먼저 점령하게 되면 경주까지 밀고 들어올 수가 있다. 북한군이 그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인해전술을 감행한다. 그러나 국군이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고 승리를 얻는다. 그 덕택에 경주 일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아니하게 된다.

그러한 전투가 한창인데 경장 손수석은 고향에서 오는 급한 전보 두 통을 받게 된다. 하나는 1950년 8월 6일에 받은 것이다. 그 내용은 부친 손영주가 8월 6일에 별세를 하셨다는 것이다. 전쟁 중이라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따라서 단 하루 발인하는 날에 맞추어서 자전거를 타고 고향을 다녀온다. 농번기이며 전쟁 중이라 장례를 3일장으로 간소하게 치르고 있다. 장지도 집에서 가까운 너븐들 상신의 선산이다;

그런데 한달쯤 지나자 또 급전이 날라 든다. 이번에는 백부인 손영한이 9월 9일에 별세를 했다는 내용이다. 손수석이 급히 하루 짬을 내어 고향에 다녀온다. 농번기라 고향사람들이 너무나 바쁘다. 그래서 상주인 손수상이 수고를 많이 한다. 역시 3일장으로 간소하게 초상을 치르고 장지는 안심에 있는 선영으로 정하고 있다;

그렇게 전쟁통에 고향에서는 두번의 초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1950년은 봉천 할매 정애라에게 있어서나 경찰관 생활을 하고 있는 손수석에게 있어서나 참으로 슬프고도 애통한 해이다. 그러한 통곡 가운데에서도 세월은 야속하게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새해 1951년이 밝아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