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43(작성자; 손진길)
1947년 11월에 유엔총회가 ‘한국’에 민간정부를 수립하고 외국군대를 철수하기로 의결하면서 ‘한국임시위원단’을 한국의 수도인 ‘서울’로 파송한다. 여기서 ‘한국’이라는 나라이름과 ‘서울’이라고 하는 수도의 이름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다음과 같다;
(1) 국제사회에서는 진작부터 조선반도를 ‘Korean Peninsular’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스스로 1907년에 ‘대한제국’의 출범을 국제적으로 선포하면서 자신이 ‘태황제’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Korean Peninsular’를 ‘조선반도’가 아니라 ‘한국반도’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조선’을 ‘한국’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양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려시대부터 한반도에 있는 나라의 이름을 ‘코레아’(Corea) 또는 ‘코리아’(Korea)라고 불렀기에 조선이거나 한국이거나 상관이 없이 언제나 ‘korea’인 것이다.
(2) 조선의 수도를 초기에는 ‘한양’으로 부르다가 나중에는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한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일본제국에서는 ‘한성’을 구태여 ‘경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는 1910년에 조선을 병합하고서 ‘경성’의 위치를 중시한다. 장차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에는 일제의 수도를 외떨어진 동경에 두는 것보다는 ‘경성’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37년에 만주를 점령하자 일제는 차제에 수도를 ‘경성’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냐? 하는 논의까지 한다. 그러한 대륙진출의 속셈이 크게 엿보이는 지명이 사실은 ‘경성’이라고 볼 수가 있다.
(3) 그런데 수도에 대한 명칭의 정리를 대한제국에서는 미처 논의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서양에서는 그냥 편하게 ‘서울’(Seoul)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찍이 통일신라시대부터 한반도의 수도는 ‘서라벌’이었기에 서양에서는 역사적으로 한양 또는 한성을 ‘서울’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군정이 당연히 ‘서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경성대학’이 자연스럽게 ‘서울대학교’로 그 이름이 바뀌고 있다고 하겠다.
(4) 1948년이 되면 ‘대한제국’에서 비롯되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한반도의 수도의 이름이 정식으로 ‘서울’이 된다. 왜냐하면, ‘서울’을 수도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1948년 12월 12일에 유엔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 그 승인을 축하하고 있는 모습이 다음과 같다;
그와 같은 거대한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1947년 12월 중순부터 경주의 외곽인 ‘모량지서’에서 순경으로 근무하고 있는 손수석은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이제는 건국경찰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 따라 손수석은 미군정 경무국 소속의 건국경찰에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민주경찰로 계속 근무하게 된다. 그러한 자신의 신분의 변화가 어째서 발생하게 되는지를 손수석은 1948년에 한반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로 이해하고 있다;
첫째로, 유엔총회가 파송한 ‘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12일 서울의 덕수궁에서 회의를 하고서 한반도에 총선거를 통하여 한국정부를 구성하기로 의결한다. 그래서 이북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소련군정이 이를 거부한다. 그에 따라 위원단은 유엔본부에 그 처리방향을 묻게 된다;
둘째로, 유엔본부에서는 급히 소총회를 소집하여 그 처리방향을 결정한다. 투표가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하여 한국정부를 수립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엔이 인정하는 유일한 한국의 정부가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결정이다. 그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장군이 유엔이 파송한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이 실시가 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하게 된다;
셋째로, 일이 급해지자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한이 모두 참여하는 통일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4월에 평양을 방문하지만 협상에 실패한다;
그리고 빈손으로 5월 5일에 서울로 되돌아와서는 이번 총선에 참여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총선거에 동참하자는 여론이 뜨겁다. 하루빨리 자신의 정부를 민주공화정으로 건설하고 싶은 것이 한국백성들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무사히 5월 10일 월요일에 총선이 실시되고 95%가 넘는 투표율을 보이면서 200명의 제헌의원이 당선된다;
5월 31일 월요일에는 제헌국회가 활동을 시작하여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7월 20일에는 간접선거로 국회에서 정부통령을 선출한다;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그리고 국무총리 이범석이 마침내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게 된다;
한편, 1948년 5월 10일에 총선거가 무사히 치루어지도록 경비업무에 철저를 기하라는 미군정 경무국의 지시가 엄중하다. 따라서 일선지서의 말단인 순경 손수석은 바쁘다. 그렇지만 걱정한 것보다는 원만하게 투표가 진행된다.
제헌국회가 구성이 되고 활동을 시작하자 대한민국 헌법이 탄생한다. 그리고 정부통령이 선출이 되고 드디어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다. 그 결과 손수석 자신이 민주경찰이 된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미군정의 건국경찰이 아니라 이제는 대한민국이라는 자신의 나라의 경찰로 근무를 할 수가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기쁜 일이 자신의 집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손수석이 득남을 한 것이다. 아내가 임신한지 8개월이 지나자 손수석은 휴가를 내어 산모 고복수를 친정으로 보냈다. 그런데 9월 23일에 아들을 낳았다고 처가에서 기별이 온 것이다. 갓20에 아들을 순산한 장한 아내이다;
손수석이 내남 너븐들 고향 부모님께 자신의 득남 소식을 전하자 부친 손영주가 ‘집안의 화목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손자의 이름을 ‘손진목’이라고 정해준다. 그때부터 손수석은 고향에서 ‘선더말 아재’라고 불리게 된다. 그가 ‘장매’ 곧 ‘선덕마을’에서 아내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말단 순경으로 시골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손수석이 고참인 상급자로부터 가장 많이 듣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1사건’이다. 당시 폭동의 명분은 쌀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명분 뒤에는 미군정의 손발이 되고 있는 경찰과 행정기관을 무력화시키고 다른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엿보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폭도들에게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곳이 경찰서이며 현직경찰이 희생이 되고 만다. 미군정의 공권력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고 위기를 맞고 있으므로 경무국에서는 대구의 폭동을 강력하게 진압한다;
그에 따라 그 폭동을 일으킨 세력들이 경상도와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서 그때부터 끈질기게 저항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정 기간동안 유입인구는 엄청 늘고 있는데 비해서 쌀 생산은 흉작이 계속되고 있어 경찰은 공출미를 쌓아 둔 창고를 지키느라고 연일 바쁘다;
그리고 경찰은 경비업무와 자신들의 방어를 위하여 항상 가벼운 ‘칼빈 총’을 어깨에 매고 다니게 된다. 참고로 가벼운 칼빈 총과 무거운 ‘M1총’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그런데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고 나자 10월달에 ‘여순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지난 1948년 4월부터 제주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여수와 순천의 부대를 이동시키려고 국방부가 명령했는데 일부군인들이 그에 불복하여 정부군과 시가전을 전개한 것이다. 그 전투현장에서는 군인들만 희생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간인과 경찰의 희생이 늘어나고 있다;
손수석이 근무하고 있는 곳은 경상도 경주지방이지만 언제 전라도의 여수와 순천에서와 같은 사건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래서 손수석은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근무에 임하고 있다. 한마디로,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경찰관 생활이다. 급료도 말단 순경이라 많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수석은 경찰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산골에서 자생하고 있는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청년들과 힘겨루기를 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싫기 때문이다. 과연 손수석과 그의 가족 그리고 고향사람들은 장차 어떠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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