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4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3. 19:31

봉천 할매41(작성자; 손진길)

 

경주의 시골인 내남 너븐들에서는 1946년 한해가 어느 해와 같이 그렇게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다. 봄에 아기들이 여럿 태어나고 초여름부터는 모내기를 한 후에 논에 물을 끌어 대느라고 모두들 바빴다. 벼가 익어가는 늦여름부터는 허수아비를 세우고 참새를 쫓느라고 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아이들은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잡느라고 야단이다;

그 메뚜기를 조리하여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이 별미이기 때문이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찾아오자 추수가 시작된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1946년에도 소출이 영 적다. 역시 가뭄이 심했던 것이다. 동네주민에 비해서 하곡과 추곡의 양이 모두 적으니 큰일이다. 그래서 봉천 할매 정애라와 아들 손수석이 작년 10월달처럼 1946년에도 현찰을 주고 양식을 사온다. 그 양식으로 내남의 일가들이 농한기를 견디고 내년 추수 때까지 생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농촌의 실정이 그러하자 미군정에서도 미국의 잉여 곡식을 가져다가 조선사람들에게 배급을 한다. 군정당국이 주는 밀가루로 조선백성들이 수제비와 국수를 끓여 먹는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밀떡을 쪄서 동네아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선교사들은 교회를 통하여 미국이나 유엔에서 온 구제품을 나누어 주고 있다. 헌 옷이지만 미제는 옷감이 질기고 좋다;

그러한 일상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에 조선의 정국은 그것이 아니다. 1946년초부터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인 5년간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두고서 좌익과 우익 사이에 피 터지는 다툼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여론의 분열이 있는 가운데 1946년 봄이 되자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이 김일성을 적극 지원하여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하고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자 이남의 정치지도자들도 조선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1947년 10월에는 조선반도 전체에 민족정부를 구성하고자 협상을 계속하던 미소공동위원회마저 완전히 결렬이 되고 만다;

 

따라서 미군정은 남북한에 조선인들이 정부를 세우는 문제를 유엔에 넘기고 만다. 그러자 유엔은 1947년 11월에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유엔의 결정을 따르지 않겠다고 반대를 한다.

그대로 있게 되면 남한에서는 미군정에 이어서 미국이 지지하는 자본주의 정부가 들어서고 북한에서는 소련이 지원하는 김일성의 노동당 정부가 영구히 뿌리를 내릴 것만 같다. 그것은 민족의 허리가 반 토막으로 끊어지는 비극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임정요인을 비롯한 민족주의 진영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봉천 할매 정애라는 새로운 고민이 있다. 그것은 아들 손수석이 도무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다. 1947년이 되니 손수석의 나이가 벌써 25살이다. 노총각이다. 그래서 봄이 되자 하루는 아들 수석에게 물어본다; “수석아, 너는 나이가 벌써 25살인데 어째서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거냐? 이 에미가 그저 옆에서 그냥 지켜 보기에는 너무 답답한 노릇이구나.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러자 손수석의 답변이 여느 때와 같다; “어머니, 작년에도 가뭄으로 흉작이어서 저희들이 일찍 추곡을 수매하여 겨우 동네 일가들을 먹여 살렸잖아요. 그런데 금년에도 그럴 것만 같아요. 그러니 열심히 농사를 짓고 그들을 굶주리지 않게 대책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지요. 그 다음에 제가 결혼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 정애라가 처음으로 아들 손수석에게 화를 낸다; “수석아, 너는 네 애비와 이 에미의 나이가 얼마인지 아느냐? 벌써 64세와 57살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기다릴 수가 없다. 그리고 수석이 네가 언제까지 너븐들 일가들을 전부 먹여 살려야 하느냐? 그들도 손이 있고 발이 다 있다. 그러니 수석이 너는 금년에 반드시 결혼을 하고 이제는 너 나름대로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라. 이 에미는 그것이 소원이다”.

그렇게 애원을 하다시피 말을 해도 아들 수석이 빙그레 웃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봉천 할매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경주 오일장에 가서 유명한 점집을 찾아간다. 도대체 아들 손수석이 언제 결혼을 하고 자식을 얼마나 슬하에 두게 되는지 그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점괘가 나왔다고 그 용하다는 경주 읍내의 점쟁이가 말한다; “아드님이 요절할 상입니다. 평범한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면 오래 살지 못하고 죽고 말 운명입니다”. 봉천 할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혼비백산을 한다. 그래서 다시 점괘를 보아 달라고 아들의 사주를 준다. 그러나 결과가 같다고 한다.

봉천 할매는 우는 심정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그 요절의 운세를 바꿀 수 있는 비방은 없는가요?”. 점쟁이가 한참 쌀을 소반 위에 뿌려가다가 ‘옳지’ 하면서 말한다; “한가지 묘수가 있군요. 이 비방은 부인의 운세를 빌려와서 요절을 면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원하시면 알려 드릴 수는 있지만 나중에 저를 원망하시겠는데요…”.

봉천 할매는 마음이 급해 진다. 그래서 그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사정을 한다; “제가 책임을 지고 원망을 하지 아니하도록 처리를 할 것이니 정확하게 그 비방을 제게 알려주세요”. 그러자 그 점쟁이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면서 말한다; “상대방의 운수와 기를 빌려온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적선을 서로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드님이 먼저 처녀에게 공덕을 베풀고 그 다음에 그 처녀가 부인이 되어 그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절을 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자 봉천 할매가 기가 찬 듯이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집 가장 똑똑한 아들의 배필로 과부를 데려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 점쟁이가 점잖게 고개를 흔들면서 말한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장애를 본의 아니게 사고로 가지게 된 처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 어느 총각이 그런 처녀에게 장가를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그러한 경우라도 충분히 공덕을 베푸는 것이지요…”.

봉천 할매가 두둑한 복채를 주고 그 점집을 나왔지만 마음속으로는 걱정이 태산이다. ‘이 이야기를 도대체 아들 수석에게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경주 읍내에서 내남 너븐들 집까지 3시간을 줄곧 걸어오면서도 머리속에서는 온통 그 생각 뿐이다. 그래서 봉천 할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며칠 동안 아들 수석의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보리수확이 끝나자 아들에게 조용하게 그 점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자 손수석이 ‘픽’ 웃으면서 한마디를 한다; “어머니, 그렇다면 내남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주 읍내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풀어서 약간 장애를 가진 처녀를 구하면 되겠네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렇게 하세요. 당사자만 건강하면 약간의 흠이 있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겠어요. 생활에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되지요. 그리고 어머니 마음에 들면 되지요”.

아들이 상상밖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봉천 할매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지만 도무지 그 속을 다 알 수가 없다. 세상사람들이 다 똑똑하고 예쁘며 건강한 여자에게 장가를 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설치고 있는데 손수석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단 아들이 승낙을 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금년에 장가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1947년 초여름부터 봉천 할매는 부지런히 내남과 경주 읍내의 친척들을 방문한다. 은밀하게 그러한 처녀를 좀 찾아 달라고 그들에게 당부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달쯤 지나자 신기하게도 서악으로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는 큰집의 셋째 딸 손영옥이 내남으로 봉천 할매를 찾아온다. 그리고 기쁜 낯색으로 은밀하게 말한다; “숙모님, 제가 좋은 처녀를 한사람 발견했어요. 어릴 때 작두를 사용하다가 손가락 한마디를 그만 잘리게 된 처녀예요. 그것 밖에는 아무 흠이 없어요. 그 처녀의 집이 있는 동네가 제집 서악에서 보면 둑을 건너 반대쪽이지요. 사람들이 ‘장매 마을’ 또는 ‘선더말’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봉천 할매가 너무나 반가워서 단숨에 물어본다; “영옥아, 그 처녀가 인물은 어떻고 건강은 어떤지 아는 게 있느냐? 또 그 집 형편은 어떠하고?...”. 손영옥이 답한다; “숙모님, 제가 그 집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요. 딸이 셋이고 막내가 아들이랍니다. 그리고 집과 전답이 있어서 사는 데는 별로 불편하지가 않다고 해요. 특히 그 집은 부모와 자녀들이 모두 인물이 좋아서 동네에서 미인들이 사는 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고 해요”.

그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다. 그래서 봉천 할매가 마지막 궁금한 점을 물어본다; “그 처녀의 성씨가 무엇이고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손영옥이 마치 자신의 일을 자랑하듯이 말한다; “19살이고요, 제주 고씨예요. 이름은 복수이고요, 그 뜻이 복을 잘 지킨다고 하는 의미라고 해요”.

봉천 할매가 마음에 드는지 질녀인 손영옥에게 마치 칙사대접을 하듯이 그렇게 대한다. 그러자 손영옥이 말한다; “아 참, 숙모님도….우리 집안이 수석이 오빠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새 발의 피’예요. 언제 오빠에게 말해서 비밀리에 그 집을 한번 살펴보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자신의 눈으로 그 처녀를 직접 살펴보는 것이 가장 여물지요”.

손영옥이 돌아가고 나자 그날 저녁에 봉천 할매가 아들 손수석을 불러서 그 이야기를 전부 전해준다. 그랬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손수석이 말한다; “어머니, 제가 그 동네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혼자서 담 넘어 그 처녀를 살펴봤어요. 여느 처녀와 같던데요. 하지만 집안 일하는 솜씨가 야무지게 보여요. 그러니 그쪽에 매파를 보내어 혼사를 추진하시면 되겠네요”;

봉천 할매는 신이 난다. 그래서 서악에 살고 있는 질녀 손영옥을 통하여 그 집에 혼담을 넣는다. 그 집에서도 딸이 셋이라 이번에 둘째 딸을 시집 보내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월성 손씨 총각의 집에서 혼담이 들어왔다고 하니 반승낙을 한다. 그 처녀의 부친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본래 제주 고씨인데 충청도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인연이 있어 이곳 경주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데 딸들을 모두 월성 손씨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차중에 이렇게 혼담이 들어오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1947년 가을에 추수를 하고 나니 역시 3년 연속 가뭄으로 수확이 영 좋지가 못하다. 그래서 봉천 할매와 손수석이 현찰을 가지고 가서 내남에서부터 경주 읍내에 이르기까지 양식을 사오기에 바쁘다. 그렇게 10월 중순까지 급한 일을 처리한 다음에 손수석이 마침내 10월 하순에 자전거를 타고가서 자신의 혼례식을 장매 마을에서 올린다.

3일 동안 처가에서 차린 신방에서 머무르고 난 후에 손수석이 장인과 장모에게 특청을 한다; “빙장 어른, 그리고 장모님, 제 나이가 25살입니다. 조선의 나이로는 노총각이지요. 그러니 하루 더 머물고 내일 고향으로 들어갈 때에 제가 아내를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허락을 해주시면 제가 나가시를 불러서 그렇게 조치를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장인 고천석이 ‘허허’라고 웃는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부인 전혜숙과 상의를 한다. 그러자 장모 전혜숙이 말한다; “손서방, 내가 둘째사위를 참 잘 본 모양이야. 자네의 그 기백과 빠른 일처리가 나는 마음에 들어. 이미 내 둘째 딸은 헌 색시가 되었으니 자네 뜻대로 하게나. 그런데 나에게 한가지 약속을 해주게.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내 딸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러자 손수석이 말한다; “제가 약속을 지키는지 아니하는지는 장모님이 오래 사시면서 지켜 보시기 바랍니다. 장모님이 오래 사시면 제가 그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장인 고천석이 고개를 크게 끄떡이면서 사위에게 말한다; “알겠네. 나도 자네 말 대로 장수를 누리도록 건강에 유의하겠네. 그러니 쌀쌀한 날씨에 감기 들지 않도록 내일 자네 부부도 옷을 따뜻하게 입고 함께 고향으로 가도록 하시게나. 그것으로 신행을 대신하겠네”.

다음날 손수석이 경주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나가시를 불러 온다;

나가시에 부부가 타고 장모가 싸준 음식보따리와 일부 살림살이를 함께 싣는다. 그리고 자전거를 차 위에 줄로 바짝 매단다. 그렇게 차로 신행을 가니 한시간도 지나지 아니하여 너븐들에 도착한다. 고향사람들이 신랑이 곧바로 신부를 데리고 왔다고 야단들이다. 가주인 손수석의 수완이 볼수록 놀랍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 부인들이 그날 신행을 온 신부집의 음식을 맛보더니 탄복을 한다. 보통 요리솜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손수석의 장모인 전혜숙이 본래 경주 읍내의 큰 요리집 주방에서 오래 일하던 유명한 요리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경주에 있는 기생집의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사와 요리사들에게도 요리교육을 시키던 선생이니 그 솜씨가 나이가 들어서도 보통이 아닌 것이다.

손수석 부부가 부친인 손영주와 모친인 정애라에게 큰 절을 올린다. 어른이 되고서 처음으로 올리는 큰절이다. 그 절을 받고 있는 손영주와 정애라는 흐뭇하기 그지없다. 바깥에서 시국은 어수선하지만 봉천 할매의 집에서는 연일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렇게 1947년 10월 하순과 11월 초순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