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312강(사64:4-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30. 03:20

이사야 강해 제312(64:4-7)

작성자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주후 2016 4 17(주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의 세 가지 특징(64:4-7)

 

이사야는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입니다(64:4).

(2)  둘째,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자’입니다(64:5a).

(3)  셋째,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입니다(64:5b).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그 사실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가 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64:5c).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는 그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빨리 인정하고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그리하지 아니하고 계속 구태의연(舊態依然옛모습이나 예전행동 그대로인 것)하게 살게 되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64:5d).

본문 제6절에서 이사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로움만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렇게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옳다고 세상적인 정의를 내세우며 계속 우기게 되면 육신적인 삶에 빠져들게 됩니다그런데 육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이며 마치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이 결코 아니므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2:11-12).

본문 제7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 대하여 더 쉽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에 대해서는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드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그와 같이 달리 표현함으로써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유익을 주고자 하는 것일까요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다시 살펴봄으로써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더 깊은 메시지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귀로 들은 자도 없고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64:4);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1)  그렇게 삶의 목표와 이유가 창조주 하나님께 정조준이 되어 있는 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의 의미입니다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사랑하십니다그러므로 이 세상역사의 끝에 종말심판을 행하시는 그 와중에서도 반드시 가려내어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은 세상의 이방 신이나 우상들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이방 신이나 우상은 사람의 삶의 목표나 가치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오로지 부디 재앙을 피하고 세상적인 복을 풍성하게 달라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자를 좋아할 뿐입니다그러한 목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오는 자들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a)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b)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c)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d)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64:5); 의미의 조각들을 하나씩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64:5a); 하나님의 공의는 창조주의 입장에서 피조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식과 같은 피조물을 돌보시고 그 생명을 모두 살리고 싶어하십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며 청지기로 창조가 된 사람들이 그 뜻을 받들어야만 합니다실제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그 일을 함께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특별히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1:26-27).

2)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특히 기쁘게’라는 용어를 삽입하고 있습니다(64:5a). 그 이유는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자 하면 청지기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자기만 살기에도 바쁜데 어떻게 남을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그리하자면 시간과 재물의 손해가 반드시 발생합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기쁘게 헌신하라고 하십니다(12:1-2). 그와 같은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뒤따르고 있습니다구원의 대상이 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을 공의의 정신으로 계속 경영할 수 있도록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22:28-30).

(2)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64:5b);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불가능한 일을 왜 실천하라고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어찌하면 될까요?

1)    하나님의 해법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게 됩니다실제로 메시아는 한 평생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게 됩니다그 모습을 자신의 인생으로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 그와 같은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2)    한 마디로주님께서 가신 그 인생길을 그대로 따라서 제자의 삶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그리하면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이사야가 여기서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64:5b)이라는 예언으로 전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64:5c);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십자가 대속의 죽음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의 실천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나아가서 세상구원을 위한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세상사람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행위입니다그것은 처벌의 대상입니다왜냐하면하나님께서 배신한 종들에 대하여 엄청 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4)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64:5d);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사람들이 얼른 알아채야만 합니다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길을 가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익과 세상적인 복락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그리고 빨리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그리하지 아니하고 계속 미적미적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예 관심을 끊어버리십니다그 결과 영생의 구원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완전히 물 건너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a)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b)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c)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4:6); 앞 절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64:6a);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자입니다그러한 자는 감히 영생의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1)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눈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그래서 자신들의 사회에서 통용이 되고 있는 의로움의 근거곧 사회적인 정의를 만족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2)    사회적인 정의는 세상의 법정에서 innocent or not guilty’라고 선언해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사회적인 법규에 저촉되지 아니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러한 정의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있다고 감히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0:3).

3)    그것은 기본적으로 육신적인 삶과 영적인 삶의 차이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매우 낮은 수준의 신앙생활입니다어떻게 세상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다수결이 또는 절대과반수가 그렇게 인정을 하고 있다고 강변할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그러한 세상적인 물량적 관념을 동원하는 것 자체가 마치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4)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와 같은 오염된 세상의 옷을 벗어버리고 영적으로 거룩하게곧 정직하고 깨끗하게 서야만 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서로가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세상적인 의로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있다고 서로 인정해주게 된다면 그 사회는 총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고 진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1:32).

(2)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64:6b); 세상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육신적인 삶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1)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목적을 잊어버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왜냐하면인생의 목적은 육신을 입고 있는 그 동안에 영생의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도록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0:19-20, 16:31). 그래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55:6).

2)    인간이 이 세상에서 입고 있는 육신은 마치 식물의 잎사귀와 같습니다그 뿌리가 땅에서 물과 자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 잎은 자연히 마르고 시들어버릴 따름입니다(64:6b). 그와 같이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는 육신의 삶에 탐닉하거나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허망할 따름입니다따라서 허무한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참된 위로는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4:6c); 하나님의 공의를 기쁜 마음으로 실천하지 아니하게 되면 어떠한 불이익이 발생하게 될까요이사야는 여기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4:6c)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1)    사람들이 이기심과 집단적 이기주의에 물들게 되면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뜻을 저버리게 됩니다그리하면 사회적으로 서로 자기만 살자고 나서게 되어 결국 패배자와 약자는 살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2)    국제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서로 자기민족만 먼저 잘살고 보자고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기에 다른 나라를 해치게 됩니다그러한 죄악에 빠지게 되면 자력으로 헤어나올 길이 없습니다죄악이 자꾸만 팽창이 되고 만연이 되어 결국은 모든 사회와 국제관계를 멸망으로 인도하고 마는 것입니다.

넷째로, (a)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b)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c)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64:7); 5절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64:7a);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공의를 실천하며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고 있는 자는 반드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그 이유는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온전히 이 세상에서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됩니다; 저는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하나님의 청지기의 일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지혜와 능력이 부족합니다그러므로 성령님을 보내어 주십시오선지자와 메시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와 그 창조주의 능력을 제게도 주십시오그런데 이사야는 선민의 사회에서 그와 같이 솔직하게 기도하는 자를 발견할 수가 없다고 개탄을 하고 있습니다(64:7a).

(2)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64:7b);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하나님이 구원해주십니다그 이유는 구속자로 오시는 메시아의 인생길을 묵상하고 그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그들이 바로 거룩한 성도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1:12-13). 사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일을 그 종으로서 대신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해보더라도 그러합니다따라서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하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붙드는 길밖에 없습니다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사야의 시대에는 그렇게 스스로 분발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64:7b).

(3)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64:7c); 이사야는 왜 선민의 나라 유다 왕국에서 그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자 결심하고 기도하는 성도를 발견할 수가 없는지 심히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1)    그 궁금증은 이사야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6:1-13). 왜냐하면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6:9)는 메시지를 선민들에게 전하도록 위탁하셨기 때문입니다.

2)    선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자연히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지 못하게 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거나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자신들이 집대성해놓은 유대교의 교리가 완벽한 것이며 선민이 형식적인 율법생활만 잘 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이사야는 장차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이방 땅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왜 그럴까요그 이유가 바로,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64:7c)라는 대목입니다하나님말씀의 기본취지인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얼굴을 돌려버리십니다하나님의 보호가 사라지게 되면 선민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이방나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오직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이 결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어떠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종말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이사야가 본문에서 세 가지로 답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여호와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장차 천국에서 영생구원을 누리고자 소망하고 있는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2)  둘째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자 곧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분발하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3)  셋째그리스도가 보여준 인생을 모범으로 삼아 그와 같이 살아가고자 애를 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성도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하며 그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간구해야만 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겉으로 보면동족인 선민들의 믿음의 실족과 영적인 타락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부디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는 권면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하지만 그 속에는 위와 같이 이사야가 메시아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선민과 이방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선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벌써 성도에 대한 예언들입니다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생애에 비추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그리고 실제로 대 선지서 이사야를 공부함으로써 성도의 삶에 있어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아무쪼록 이사야 공부를 통하여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기쁨으로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