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309강(사63:15-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4월 14일(목)
선민과 이방인들이 범한 죄과를 단 한번 창조주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고 탕감해달라고 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사63:15-17).
본문 이사야의 예언은 욥기 제19장 제23-27절 말씀을 참조할 때에 더욱 선명하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욥기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19:23-27).
욥기의 기록은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1) 첫째, 훗날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대속자가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욥19:25). 이사야는 그 대속자가 바로 구속자이신 여호와의 종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11:1-9, 53:4-12, 63:16).
(2) 둘째, 그 사실을 믿는 자는 부활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욥19:26). 이사야는 현세적인 복과 구원을 넘어서는 지극히 존귀한 영생의 복과 구원이 하늘 하나님의 처소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사11:5-9, 52:13-15, 63:15, 65:17-25).
(3) 셋째, 구속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니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욥19:27). 특히 본문에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63:16).
그와 같은 이해를 먼저 가지고서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묵상을 통하여 깊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a)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b)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c)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사63:15); 이사야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1)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사63:15a); 이사야는 멀지 아니하여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마저 불타버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1) 그 이유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말씀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만민구원을 위한 제사장나라가 아니라 선민만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제사장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배우며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세상적인 복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2) 그 결과 선민으로 자처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루살렘 성전에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늘로 올라가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을 안타깝게 찾고 있습니다. 부디 이 불쌍한 백성들을 다시 한번 굽어 살펴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사63:15b);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선민으로 삼으신 시내 산 언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해내시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열 가지의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십니다. 마지막 재앙은 유월절 사건입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장자로부터 모든 백성의 장자가 모조리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한 바로의 군대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홍해바다에 수장을 시켜버리십니다.
2) 생각해보면, 그것은 참혹한 죽음의 연속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구출하는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애굽 인들의 희생이 너무나 큽니다. 그 일을 행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비슷한 사건이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에 다시 한번 예루살렘에서 발생합니다. 성을 포위공격하고 있던 앗수르 군대가 한 밤중에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공격하여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사를 죽이고 예루살렘 성을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그 사건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선보여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혹한 일입니다.
3) 그러므로 여기서 이사야는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사63:15b)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게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눈물을 머금고 애굽의 백성들과 앗수르의 병정들을 몰살시키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지만 그 보답이 배신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열심도 그 구원하심도 선민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선지자의 한탄입니다.
4) 하지만 이사야는 여전히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리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배신하고 있는 선민과 이방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구원해달라고 하는 중보의 기도를 올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사63:15b).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며 그 창조의 책임을 모두 감당하시겠다고 하는 의사표현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이 여기서 ‘아버지’이며 ‘구속자’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사63:16).
(3)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사63:15c);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비와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신다는 교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공의’(公義, righteousness, 쳬다카, 흠이 없이 옳은 것)는 본래 창조주에게 속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모두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반면에 피조물인 사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피조물을 모두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하고 있는 집단을 먼저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모두의 생명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살기에도 힘이 벅찬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가 속하고 있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그 이익에 합당한 명분을 ‘정의’(正義, justice, 미쉬파트, 율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정의는 법정에서 판결이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이 부당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돈과 권력의 힘에 의하여 불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정한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힘없는 백성들은 정의사회구현이라도 실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가 곧 하나님의 공의인줄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3)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고 그 생명을 살리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종을 통하여 그 일을 계속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자비와 사랑을 선민들이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선민의 사회에 더 이상 내리지 아니하고 있다고 이사야가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사63:15c).
둘째로, “(a)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b)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c)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63:16); 이사야는 선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구속자를 보내어서 만민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63:16a); 훗날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대선지서를 자주 인용하십니다. 특히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면서 그 첫머리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ollowed be thy name, 마6:9)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가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아버지와 같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자비와 사랑은 선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만민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만물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자신의 본문 예언이 선민들에게만 국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사63:16b); 이사야가 ‘우리 아버지’의 개념이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1)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롬4:16). 그러나 창세기의 내용을 정밀하게 살펴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도 많은 믿음의 인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뒤를 잇고 있는 셋의 가문이 그러합니다(창5:3-32). 홍수심판 후에는 노아의 하나님신앙을 대물림하고 있는 셈의 가문이 그러합니다(창9:26, 10:21-31). 그 가운데 아르박삿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이 가나안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신앙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창11:10-26, 12:1-5).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신앙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선대의 수 많은 믿음의 가문에 대한 무시입니다.
2)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에서도 문제는 발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브라함의 아들 가운데 이삭을 제외한 7명의 아들을 하나님신앙이 없는 이방인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창25:1-18). 나아가서 이삭의 장남이며 야곱의 형인 에서의 자손들을 모두 이방인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창36:9-43). 그리고 에돔 족속을 유대인들이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사34:5-15).
3) 그와 같은 속이 좁고 편협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선민사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사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강조하며 이방인들을 멸시하던 선민의 나라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욥기가 새로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족장의 시대에 동방의 땅에서 하나님신앙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욥기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욥이 대속자 메시아 사상과 부활의 신앙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게 되면 신원이 회복된다는 교훈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4) 그것이 모두(冒頭, 머리부분)에 말씀 드린 ‘욥19:23-27’절과 욥기 제42장의 내용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사야가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사63:16b). 선민의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므로 이제는 선민과 이방인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선민사상은 철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의 공의의 정신을 성도들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을 함께 찬양할 수 있는 믿음생활입니다.
(3)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63:16c); ‘구속’이란 종의 몸값을 다른 사람이 속전으로 대신 치르고 당사자를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구속은 자신이 마련한 돈으로 속전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속전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속자를 대신 보내셔서 그 속전을 지불하게 하십니다.
2) 그 지불의 방식이 메시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그 대속의 제사가 자신의 죄를 청산하는 희생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죄에서 풀려나는 구속의 역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망의 권세아래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능력임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은혜가 훗날 임하게 됩니다.
3)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구속자로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속사업을 실천하십니다.
4)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①첫째, 창조주께서 사람을 잘못 만든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속자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대신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②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구속자로 오신 메시아가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구원사업은 선민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며 부활인 것입니다.
셋째로, “(a)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b)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c)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63:17); 자식의 잘못을 부모가 대신 짊어진다는 것이 구속자를 보내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간구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사63:17a); 선민들이 하나님말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며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한 것은 그들의 욕심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책임을 선민에게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의 길을 떠나도록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식을 잘못 키운 부모의 책임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불평과 불만이 터져나올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속자 메시아를 그들의 사회에 보내어주십니다. 그리고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다시는 위와 같은 배은망덕한 책임회피가 통하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이미 자신이 사람을 잘못 만든 책임을 통감하시고 그 책임을 무겁게 스스로 십자가에서 청산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63:17b); 똑 같은 의미의 말을 이사야가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대목은 모세오경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을 노예와 같이 부리고 있는 애굽 인들의 가혹행위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십니다. 무려 열 가지의 재앙을 차례로 그 땅에 내리십니다. 그 과정 중에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자꾸만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에 대하여 모세는 때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9:12).
2)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신 것이므로 그 책임의 소재는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항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목이 곧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서도 변명이 가능합니다(출32:9, 신9:6). 이스라엘 자손을 잘못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지시고 새로운 방법으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이 훗날 나타나게 됩니다; “메시아의 공생애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이 유대인 사회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63:17c); 겉으로 보면, 이사야가 선민들의 선지자로서 동족들인 선민들의 이익을 위하여 부르짖고 있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1) 여기서 ‘주의 종들’이란 이사야 제52장 말미와 제53장에서 예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들’이며 구체적으로 메시아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 이스라엘 12지파에 국한이 되고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미 이사야가 제19장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19:24-25).
2) 그 옛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주시듯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분깃과 기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30). 아울러, 사도 바울의 힘 있는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6-17).
결론적으로, 이사야의 마지막 기도는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63:17c)라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타락하자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시고 그 땅을 떠나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땅에 구속자 메시아를 다시 보내어주시는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선민의 자손들이 메시아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이고 그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여호와의 은혜가 다시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선민’이라는 용어 대신에 ‘주의 종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민은 다분히 혈통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단지 메시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즉, 혈통적인 의미나 제도적인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요1:12-13). 따라서 이제는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인위적인 구분과 차별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12지파에게 기업이 분배된다고 하는 전통적인 관념도 사라지게 됩니다.
오로지 이제부터는 구속자 메시아를 보내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성도들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기업을 상속받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며 이 땅에서도 배운 바대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나누어준 것과 같은 영적인 자신의 기업을 경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비전과 신앙을 가지고서 당장 이 땅에서 남은 인생 가운데 발길이 닿는 대로 하나님말씀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충만한 성도의 삶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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