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311강(사64: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4월 16일(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여호와의 강림하심에 대하여(사64:1-4)
본문예언을 시작하기 전에 이사야는 제63장 말미에서 이미 네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완악하게 자신들의 선민우월사상과 현세적인 축복만을 고집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만민구원을 위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만 선민의 나라를 떠나버리셨다는 것입니다(사63:17).
(2) 둘째,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아니하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선민의 나라가 오래지 아니하여 망하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마저 적에게 유린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사63:18).
(3) 셋째, 이사야는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마저 타락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보내고 있으니 이방인들 곧 자신들의 수호신과 우상을 섬기면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그들은 진작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성소를 유린하는 세상나라가 그들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63:18).
(4) 넷째,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의 후손들이 훗날 주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룩한 성도가 모두 될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사63:19).
그런데 본문에 들어오게 되면 이사야는 장차 누가 여호와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의 대상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더 이상 선민과 이방인의 구분이 아닙니다. 그러한 인위적인 이분법에 의한 차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천국을 소망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자를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64:4). 그리고 그러한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이 세상에 친히 강림하시고 강력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사64:1-4). 그것은 전반적인 불 심판이며 전대미문(前代未聞, 옛적에 들은 바가 없는 것)의 가장 두려운 세상심판일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사64:3). 사실 그것이 종말심판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되고 있습니다(사65:17-18, 계21:1-2).
이사야가 그와 같은 내용을 본문의 구절 가운데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더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b)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사64:1); 이사야는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소원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사64:1a);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신다”는 것은 그 옛날 여호와께서 출애굽 당시 홍해바다를 가르신 것과 비슷합니다(출14:21). 하나님의 능력이 자연의 힘과 그 흐름을 갈라버리시는 것입니다;
1) 그런데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의 하늘은 다음 두 가지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지구에 속한 물질적인 것들이 지구의 생태계를 벗어나는 것을 지구의 하늘이 차폐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이 그 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창1:9). ②둘째, 지구와 그 하늘 아래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동일한 시간의 흐름이라는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2) 그러나 그 하늘을 벗어나게 되면 시간의 차원이 달라지기를 시작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 대목을 묵상해보면 영생하시는 창조주께서 어떻게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세계에 들어오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하늘을 가르고 강림을 하시는 것입니다”(사64:1a). 그 때문에 지구상의 천하만물에 대하여 시간의 흐름을 제어하고 있던 그 차폐장치가 깨어져버립니다.
3) 따라서 영생의 능력이 시간에 갇혀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바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보호장치가 깨어져버리고 창조주의 영광의 빛 앞에 노출이 된 모든 피조물이 그 두려움에 벌벌 떨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발생하게 될까요?
(2)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사64:1b); 여기서 ‘산들’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높은 산들을 의미합니다. 둘째, 산과 같이 인간세상에 우뚝 버티고 서있는 강대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그 두 가지가 모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강림을 하시자 그 앞에서 사시나무와 같이 떨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영생의 하나님께서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간의 축이 허물어지고 물질이 녹아지며 육신이 타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벧후3:12). 그러므로 세상의 부귀영화나 세상임금의 권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게 되고 맙니다(요12:31).
2) 참고로, 그 옛날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 잠시 강림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에 대하여 모세가 적은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19:16-19).
3)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 본연의 모습과 그 두려운 능력을 개방하시고 그대로 강림하셨더라면 그 앞에 있는 삼라만상과 모든 사람이 녹아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빽빽한 구름으로 그 진면목과 능력을 감추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 위세가 너무나 강렬하여 여전히 백성들이 죽임을 당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모세가 진언을 하자 여호와께서는 곧 나팔소리를 줄이시고 나직하게 사람의 음성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다.
4)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종말심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일일이 사람들의 사정을 봐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과 동행하시기 위하여 일찍이 모세에게 명령하여 성막을 짓도록 조치하셨습니다(출25:8). 그 성막이 나중에는 성전 내에 위치하게 됩니다(왕상8:6-11). 그렇지만 하나님은 성전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고 맙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이기적인 선민구원사상과 물질적인 축복사상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5)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러한데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 결과 이 세상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신 여호와께서 다시 임하시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시간이 멈추고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시간이 출발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a)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b)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c) 이방나라들도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사64:2); 불 심판이 어떻게 임하게 될까요?
(1)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사64:2a); 일찍이 노아 시대에는 홍수심판이 임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물 심판입니다. 코로 숨을 쉬는 모든 생물들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호흡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모두가 질식사(窒息死, 숨이 막혀 죽는 것)를 당하고 맙니다(창7:22). 홍수심판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와 같은 전면적인 물 심판이 지상에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창9:11). 이에 따라 종말심판은 물 심판이 아니고 불 심판의 모습으로 임하게 됩니다(사64:2a).
2) 하나님께서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육지와 바다에 하늘에서부터 유황불을 내려 보내십니다. 그것은 일찍이 소돔과 고모라 등에 유황불을 내려 보낸 것과 같습니다(창19:24-25). 그 불로 말미암아 육지의 모든 것들이 마른 섶(잡풀 따위를 말린 것)과 같이 활활 타버리게 됩니다. 바닷물도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마치 용암을 만나 펄펄 끓어오르듯이 그렇게 유황불로 말미암아 수증기로 변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바다의 물이 모두 증발하고 바다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고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계21:1).
(2)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사64:2b);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은 두 가지입니다; ①첫째, 그 몸통은 사탄과 악한 영들입니다. 그것들이 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②둘째, 그 깃털은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하수인들입니다. 바벨론과 같은 나라들과 세상임금입니다(계17:2, 5). 그리고 적 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입니다(계20:10). 기타 백성들은 세상의 권력자들과 거짓선지자들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세력에게 종말심판을 행하시고 동시에 그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원수들을 체포하여 심판하는데 집중하게 됩니다(계20:2). 그와 같은 이치를 이사야가 여기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사64:2b)라고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이방나라들도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사64:2c); 훗날 메시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과 악한 영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흔히 말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고 맙니다(롬8:1-2). 그러므로 악한 영들의 권세를 빌려서 그 동안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이방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벌벌 떨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실체 곧 악한 영이라는 몸통이 제거가 되고 말았기에 그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깃털 곧 이방나라의 임금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
셋째로, “(a)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b)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사64:3); 이사야는 어째서 여호와의 강림사건을 전대미문이며 상상을 초월하고 있는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사64:3a);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 그럴 만도 합니다. 태어날 때에 이미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줄곧 사회 속에서 자라나고 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이 사회와 자연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단지 짧은 100년 안팎의 인생을 살고 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2) 하지만 종말심판이 임하게 되면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세상의 끝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영원한 것으로 여겨지던 이 세상이 한갓 유한한 피조세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영원한 존재는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 곧 창조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자만이 영생의 구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이 얼마나 두려운 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사64:3a).
(2)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사64:3b); 이 대목은 이사야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옛날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을 하시자 그 큰 산이 진동을 했습니다(출19:18). 마찬가지로 불 심판을 행하시고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게 되면 세상의 모든 산들이 벌벌 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큰 산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세상에 큰 권력으로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들과 최고권력자들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넷째로, “(a)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b) 예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64:4); 여호와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을 이 세상에 행하시는 것일까요?
(1)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사64:4a); 세상의 역사를 끝장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1) 그것은 선민을 의미하고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혈통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요1:12-13). 그러므로 선민 이방인 상관이 없이 누구라도 이 세상에서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을 위하여 한 평생 일하다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그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고자 소망하는 자들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입니다.
2) 구체적으로 메시아가 오신 이후에는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제자들 곧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 시대에는 믿음의 열조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명 ‘믿음의 장’으로 불리고 있는 히브리서 제11장의 내용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3) 그와 같이 간절하게 구원자를 기다리며 천성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강림을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압제하고 있는 모든 세상의 권력자들을 징계하십니다. 물론 그 이전에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과 악한 영들을 처리하십니다.
4)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그렇게 이 세상에 대하여 종말심판을 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사64:4a). 그리하면, 새 세상에서는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새로운 세상의 경영자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눅22:28-30).
(2) “예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64:4b);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옛날에 기록이 되지를 못하고 사람의 기억을 통하여 전달이 되어 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글로 적혀서 보존이 되어 왔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보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요14:9).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예부터 들은 자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승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판소리와 같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하나님이 경영하고 섭리하시는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기억과 암송으로 전승이 되어오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거나 기억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이야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귀로 들은 자도 없고”; 선지자들이 당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조차 그 말씀을 듣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선지자들이 후대를 위하여 글로 적어서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읽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아가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선지서의 뜻을 풀이하여 말로 전해줍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듣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
3)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말을 듣고자 아니하니 이제는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직접 수 많은 창조주의 능력을 시현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기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온전히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이 동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직접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 대속의 희생이며 무덤에서 부활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공식적으로 시작이 되는 종말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마24:29-31). 그러나 그 예언을 믿는 자가 극소수에 불과할 따름입니다(사64:4b).
결론적으로, 올바른 믿음과 종말신앙을 가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익숙한 이 세상이 언제나 영원히 계속이 될 것만 같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가 이 세상은 역사의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반드시 강림하시고 심판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지만 그 예언을 믿는 자가 많지를 못합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 살면서 한평생 하나님말씀의 뜻을 만민구원으로 실천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성도를 구원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세상에 강림하신다는 것이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 예언의 말씀을 믿고서 한 평생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믿음의 길로 달려나가시는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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