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할배93(작성자; 손진길)
20. 을축년 대홍수와 서배 할배의 깊은 한숨
1925년 7월에 들어서자 대만지역에서 발생한 태풍이 조선반도의 중부권을 강타하고 북쪽으로 빠져나간다. 집중호우로 인하여 한강이 범람하고 남쪽에 있는 낙동강까지 범람을 하고 만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다시 대만에서 태풍이 발생하여 조선반도의 중부지역과 북부지역을 강타한다. 그 때문에 한강이 다시 범람하는데 저지대에 속하는 영등포와 용산 일대가 진흙바다가 되고 만다. 무려 3만 정보 이상의 땅이 물에 완전히 잠기고 만 것이다.
그해 8월초에 다시 중국의 남부 양쯔강 지역에서 태풍이 발생하여 조선반도의 북부와 간도지역을 강타한다. 그 때문에 황해도 일대에 큰 홍수가 나고 만다. 그런데 조선반도 남부지역인 호남평야와 영남지역의 농경지에 가장 큰 피해를 발생시킨 것은 그해 을축년 8월말에 발생한 태풍과 대홍수이다.
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에서 발생한 태풍이 9월 6일에 제주도를 통과하고 조선반도 남부에 상륙을 하였는데 그 때문에 호남의 영산강과 섬진강 그리고 영남의 낙동강 유역이 전부 크게 범람을 하고 만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홍수이다. 그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지역이 형산강 유역 이조천변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내남 사람들의 농경지이다;
하천이 대규모로 범람하자 그 주변의 농경지가 진흙과 자갈로 완전히 뒤덮이고 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서 서배 할배 손상훈 부부와 손영주 부부는 말문이 막힌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이기 때문이다. 하천변의 논밭이 전부 자갈밭으로 변하고 말았으니 서배 할배가 소유하고 있는 전답의 절반 이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천석꾼 살림이 갑자기 500석 이하로 내려앉고 만다. 그것을 무기력하게 뻔히 바라보면서 서배 할배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연약하고 허무하다는 생각만이 들고 있다. 옛말에도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하였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아니하시니 천석꾼 살림이 그만 을축년 대홍수로 반토막이상이 날라가고 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서배 할배 자신의 조부 때부터 선친과 자신의 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년 가까운 세월을 투자하여 피와 땀으로 일구어 놓은 것이 그 1,000마지기의 전답이다. 그런데 그것이 75세의 노인이 된 서배 할배 자신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만 천재지변으로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시골인 내남 너븐들에서 한평생 농토를 개간하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자식과 자손들을 키우는 한편 그 지역의 일가들에게 소작을 주어 그들의 생계를 도와주고 있는 가주 손상훈에게 있어서는 조선의 왕조가 일제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며 상실이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자신과 아들 손영주에게는 그 손해를 만회할 수 있는 아무런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해 논농사가 엄청난 흉작이어서 너븐들에서는 절반 남짓 수확에 그치고 만다;
평소 조선에서 수확한 쌀의 절반 이상을 일본제국이 가져가서 일본인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그런데 쌀이 부족하니 조선총독부는 초강수를 사용한다. 조선의 미곡을 거두어 일본으로 보내고 그 대신에 만주의 콩과 잡곡을 사와서 조선백성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이 되지가 않는다. 을축년 대홍수는 조선반도에만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간도지역의 농경지에도 심대한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주에서도 양식이 모자라서 큰 일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소위 ‘쌀 파동’이 1918년에 이어 다시 발생한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쌀을 달라’고 하면서 시위를 크게 벌인 것이다;
일본정부는 그 시위를 좌익세력과 공산분자들이 획책하고 모의한 것이라고 선전을 하면서 강력하게 대처를 한다. 그러나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주리게 된 백성들의 아우성을 경찰력만으로는 통제할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보고서 일본의 군대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때부터 소위 ‘군부가 내각을 지배하는 시대’ 곧 ‘군국주의 일본제국’이 출범하게 되는 것이다;
군부가 민간정부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전쟁을 잘 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부정부는 전쟁으로 현안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또 하나는, 민중의 불만과 시위를 좌익의 준동으로 몰아 강력하게 진압하고 공산주의 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시민사회를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정치이며 강력한 전체주의 독재이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일본제국은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경제적인 불황과 더불어 미곡생산량이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제의 식민지인 조선에 있어서는 1925년에 비밀리에 결성이 된 조선공산당이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군대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그 빌미를 찾고 있으므로 간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들이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들을 지원하고 있는 한인촌의 조선인들도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마침내 1928년에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이 열차 폭파사고로 죽게 되고 1931년 9월에는 일본의 군대가 만주로 진격을 하고 만다. 일본군대는 봉천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울 준비에 들어간다. 그것이 소위 ‘만주사변’인데 그 일의 뿌리는 사실 을축년 대홍수에서부터 뻗어 나가고 있다고 하겠다.
조금만 설명을 더하자면,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은 장개석의 군대와 힘을 합하여 일본의 군대를 몰아내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일본은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본제국의 괴뢰정부 ‘만주국’을 1932년 2월에 세운다;
길림성, 흑룡성, 봉천성으로도 불리고 있는 요녕성 등 3개 성에 3,0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신생국이 소위 ‘만주국’이다;
만주국의 성립으로 말미암아 간도지역에서 활동을 하던 조선독립군은 일본의 군대에게 토벌이 되었으며 일부 살아남은 독립군이 중국내륙이나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고 만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사건의 전개는 일찍이 경주 성동 사랑방모임에서 선비들이 장교장과 안교장 그리고 권동진 선생의 도움을 받아 벌써 전망한 결과와 비슷하다. 그러나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과 실제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당장 1925년 9월달에 서배 할배 손상훈은 을축년 태풍과 홍수가 휩쓸고 간 거랑가의 논밭과 절단이 나버린 벼농사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아득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천석꾼인 자신이야 단 400석의 수확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먹고 살 수는 있다. 그러나 5마지기 또는 10마지기의 농사를 소작으로 짓고 있는 일가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 서배 할배가 지주와 가주의 책임을 다하여 300석의 곡식을 그들을 위하여 푼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절대량이 부족하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하는가? 서배 할배가 내리고 있는 결단은 경주의 대지주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논을 일부 헐값에 파는 것이다.
그것으로 양식을 구하여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에 살고 있는 소작인들을 구휼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만 하는 책무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아들 손영주에게 얼마의 전답을 대물림할 수가 있을까? 서배 할배가 어림 잡아 계산을 해보니 300석지기도 못될 것만 같다.
그것으로 손영주의 가족이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손영주의 자질로 볼 때 자수성가형이 아니므로 점점 살림이 쪼그라들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서배 할배 손상훈은 아득한 절망감을 다시 느끼고 만다.
노년에 자신은 보지 말아야할 일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작년에 일찍 눈을 감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남은 여생을 맥없이 살아가게 되는 서배 할배 손상훈이다.
그는 더 이상 경주 성동 사랑방모임에 나가지를 못한다. 경주 오일장에도 출입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 종일 손주들이 자라는 모습만 사랑방에서 내다보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그들 중 누구라도 대신 이룰 수가 있기를 간절히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절대자 그 운명의 신에게 두 손 모아 기원을 드릴 따름이다.
일찍이 한반도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을축년 대홍수 앞에 망연자실해 있는 서배 할배 손상훈에게 남은 소원이란 후손들 가운데 영특한 자가 나타나서 집안과 가문 그리고 지역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반도에 민주공화제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 남지 아니한 자신의 여생에 있어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서배 할배 손상훈은 그러한 숙원사업을 후손들에게 남기면서 남은 몇 년의 여생을 내남 너븐들 자택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 숙제를 누가 풀 것인가? 그 문제는 서배 할배의 아들 대와 손자 대의 이야기를 계속 추적하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도리밖에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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