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9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7. 08:18

서배 할배91(작성자; 손진길)

 

1923년 10월 15일 점심시간에 시작이 된 경주 성동 사랑방모임은 이틀 후 점심식사를 하고서야 끝난다. 평소 같으면 당일 점심식사를 하고나서 오후 3시쯤에 끝이 나는데 그날은 특별히 2박 3일로 진행이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갑자기 반가운 벗들이 4명이나 멀리서 찾아왔기 때문이다.

부산에 살고 있는 장인식 교장과 안성기 교장, 그리고 북간도 용정에 살고 있는 오경덕 선생과 경성에 살고 있는 권동진 선생 등 참으로 보고 싶은 동지들이 한꺼번에 방문을 했으니 그 기쁨이 대단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같으면 일주일 정도 계속 모임을 하고 토론을 하겠지만 지금은 노인들이 되어서 체력상 그러지를 못한다.

따라서 3일째 되는 날 점심식사를 하고서 헤어지기로 한다. 4사람의 동지들을 멀리 떠나 보내면 또 언제 만나게 될까? 나이가 벌써 73세나 된 서배 할배 손상훈과 김춘엽 선비는 장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마음과 그리움으로 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눈다.

서배 할배 손상훈과 부인 이채령이 내남 너븐들 집으로 돌아오니 며느리 정애라가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엌일을 하고 있다. 손자 둘은 맏이인 손녀 손해선이 돌보고 있다. 손해선은 1913년생이므로 벌써 11살이다. 그리고 큰 손자 손수정은 7살이고 둘째 손자 손수상이 4살이다. 그렇게 손주들이 마당에서 잘 뛰놀고 있는 것을 보니 먹지 않아도 서배 할배 부부는 배가 부른 것만 같다.

부엌에서 일을 하던 며느리 정애라가 성동 사랑방모임을 2박 3일로 다녀오신 시부모님께 인사를 하면서 여쭈어 본다; “아버님, 어머님, 저희 친정집에는 별고가 없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이틀 밤이나 주무시고 오신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시어머니 이채령이 정애라를 보면서 말한다; “너희 친정 부모님은 다 잘 계신다. 다만 멀리서 옛날 친구분들이 한꺼번에 사랑방모임을 방문하였기에 일정이 2박 3일로 길어진 거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들 손영주가 집으로 돌아온다. 아마 이웃에 소작일로 볼일이 있어 출타를 했던 모양이다. 반갑게 부모님께 인사를 한다. 그러자 부인 정애라가 얼른 말한다; “여보, 아버님 어머님은 성동 사랑방모임에 귀한 손님들이 찾아오셔서 그만 이틀 밤 유하시면서 서로 말씀들을 나누신 모양이에요. 저희들이 괜한 걱정을 했어요. 호호호…”.

손영주는 아내가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경주 모임에 가셔서 당일 돌아오지를 아니하셨기에 나름대로 걱정을 했던 것이다. 1884년생인 손영주가 어느 사이에 3자녀의 아버지이며 40세의 중년이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그때 손영주의 형 손영한이 대문을 들어선다. 그는 친동생 손영주 부부와 그 양부모 서배 할배 내외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말한다; “숙부님과 숙모님께서는 평안하십니까? 제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러자 서배 할배 손상훈이 반갑게 7촌 조카이자 양아들 손영주의 친형인 손영한에게 말한다; “그래 우리 늙은이들이야 잘 지내고 있지. 조카는 별일이 없으신가?”.

손영한이 말한다; “네 숙부님, 저희들은 덕택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경주 읍내 오일장에 갔다가 생선을 몇 마리 샀습니다”;

 손영한이 이어서 말한다; “저희 집사람과 여기 제수씨가 모두 산모이므로 몸보신을 하라고 조금 가지고 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손영주가 나서서 생선꾸러미를 받으면서 말한다; “형님, 형수님이나 신경을 쓰시지 무엇 저의 집사람까지 그렇게 챙기십니까? 고맙습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서배 할배 손상훈과 부인 이채령이 자리를 피해준다. 친형제 간에 우애를 나누도록 어른으로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애라가 남편 손영주로부터 그 생선을 받아 들고서 다시 아주버님인 손영한에게 인사를 하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손영주가 친형 손영한에게 말한다; “형님, 이번에는 아들을 보셔야지요. 집사람이 형수님 배가 많이 부르다고 말하던데 아들이겠지요?”. 그 말을 듣고서 손영한이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집에 딸만 둘이니 자네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구만…”.

 이어서 손영한이 웃으면서 말한다; “염려하지 말게 이번에는 아들인 것 같아. 그리고 딸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이 문제인가? 동생 집안에 벌써 아들이 둘이나 되지 않는가? 하하하…”. 기분 좋게 웃고 있는 4살 위의 친형 손영한을 보면서 손영주가 생각한다; “그래, 만약의 경우에는 내가 아들 하나를 나중에 형 집에 양자로 줄 수도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그해 양력으로 1923년 12월이 되자 손영주의 아내 정애라와 손영한의 아내 이신자가 해산을 한다. 정애라는 8일날 아들을 낳는데 그것을 보고서 서배 할배 손상훈이 ‘손수석’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 이름은 ‘빼어나게 큰 인물’이 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서배 할배의 소망대로 그 아기가 나중에 그러한 인물이 되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신자는 12일에 딸을 낳는다. 손영한으로서는 딸만 3이 된다.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라서 실망이 된다. 왜냐하면, 아내 이신자가 1886년생이므로 금년에 38세이기 때문이다. 잘해야 다음에 한번 정도 아기를 낳을 수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나이 40이 되면 출산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모 이신자가 애를 써서 출산을 하고서도 남편 볼 면목이 없다. 그래서 갓난아기가 딸임을 확인하고서는 남편에게 조용히 말한다; “여보,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그러자 손영한이 ‘껄껄’ 웃으면서 말한다; “부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무 걱정 말고 산후 몸조리나 잘 하세요. 세상에는 인력으로 안되는 일이 있는 법이요”.

이신자는 자신이 남편복은 있다고 생각한다. 아들복은 아직 없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으니 그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면서 남편에게 말한다; “여보 제가 빨리 산후조리를 잘하고 일어나서 다음에 반드시 아들을 떡하니 하나 낳아서 안겨 드릴께요”. 그 말을 듣자 손영한이 말한다; “당신은 넉넉하게 그렇게 할 수가 있을 것이요. 그리고 그것보다 나는 당신이 건강하게 평생 내 곁을 지켜주는 것이 더 좋소…”;

그것이 손영한의 진심이다. 그 말을 듣고서 이신자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그것은 염려하지 마세요. 당신이 제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하여 ‘칠거지악’으로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집을 떠나지 아니하고 반드시 당신 곁을 지킬 거예요. 그렇게 아세요”. 그 말을 들은 손영한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금슬이 좋은 손영한 부부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친동생 손영주도 부부간에 금슬이 참으로 좋다. 오죽이나 손영주가 정애라의 말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끄떡이고 있으므로 동네사람들이 그를 ‘아내 바보’라고 부르고 있겠는가? 그렇게 순한 손영주가 동네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혹시 끼니를 굶고 있는 가정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집안 곳간의 양식을 퍼서 생계가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고 있는 손영주이기에 내남 너븐들과 안심에서는 굶는 가정이 없다. 그렇게 손영주는 천석꾼을 이룬 자수성가의 조상 손성규나 손상훈보다 더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다. 그래서 서배 할배의 논밭을 소작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사람들은 너븐들 천석꾼 손부자의 살림이 오래가기를 한결같이 바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