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89(작성자; 손진길)
19. 관동대지진과 그해 태어나는 셋째 손자
서배 할배 손상훈과 부인 이채령이 1923년 10월에 경주 성동 김춘엽 부부의 집을 방문하여 사랑방모임에 참석을 한다. 작년 2월 모임에서부터 사돈 내외가 참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6사람이 모여서 오붓하게 다과를 나누면서 정담을 나누고 있다.
10월 보름이라 가을걷이가 끝나고 이제는 한숨을 돌리고 있는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그날 뜻밖에도 참으로 반가운 손님이 4사람이나 한꺼번에 그 사랑방모임에 찾아온다. 부산에서 온 장인식 교장과 안성기 교장 그리고 북간도 용정에 살고 있는 오경덕 선생 외에 또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권동진 선생이다;
서배 할배는 두 교장선생과 오 선생과는 지난 1921년 5월에 헤어지고 거의 2년반만에 만나게 된다. 그리고 권동진 선생과는 정말 오래간만이다. 권선생은 1907년에 순종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사면을 받게 되지만 사실은 1906년에 조선에 통감부가 생기면서 벌써 망명생활을 끝내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권동진 선생이 1906년 5월인가 부산에서 한성으로 가는 도중에 덕천 사랑방모임을 한번 들린 것으로 서배 할배는 기억이 된다. 그러므로 17년이 지나서 서로가 상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절을 하면서 상대방이 많이 늙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은 자신도 그만큼 늙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거울과 같다. 서배 할배 손상훈과 김춘엽은 자신들이 작년 5월에 작고한 손병희 선생보다 10살 연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권동진 선생은 고 손병희 선생과 동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동진 선생이 자신들만큼 늙어 보인다. 그 이유는 그가 지난 3년 이상의 세월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3.1만세사건을 기획한 권동진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일경에게 잡혀 들어가서 3년형을 받고 만기 출소를 하였으니 심신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무인 출신답게 형형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한 순배 인사를 하고 나자 좌중이 조금 조용해진다. 그때 오경덕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먼저 말문을 연다; “사전에 기별도 없이 갑자기 성동 사랑방모임에 참석을 하여 죄송합니다. 깜짝 놀라셨지요. 저도 한달 전에 권동진 선생께서 북간도 용정 명동마을로 저를 찾아 오셨을 때에 그렇게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서배 할배 손상훈이 묻는다; “그러면, 권동진 선생께서는 출소하시자 마자 곧바로 북간도로 오경덕 선생을 찾아가신 것입니까?”. 권선생이 눈을 감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대답을 한다; “네, 저는 아직 옥중에 있을 때인 1922년 5월에 손병희 선생께서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사를 함께 도모한 최린 동지는 이상하게도 먼저 가석방이 되고 저는 한용운 선생과 함께 1923년이 되어서야 만기 출소를 하였지요…”;
권동진 선생이 ‘후유’하고 잠시 한숨을 쉰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본래는 1919년 3월 1일에 잡혀 들어갔으므로 3년 징역이라고 하면 그때부터 계산하여 1922년 3월에 출소를 하는 것이 맞지요. 그런데 일제는 그렇게 계산을 하지 않고 1920년 10월에 결심공판이 있은 날로부터 따져서 1923년 10월에 내보낼 심산이었어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들 항변을 했더니 자신들의 계산보다 거저 몇달 정도 일찍 내보내 준 것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제멋대로이지요. 그것이 강자의 논리인가 봅니다…”.
권동진 선생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은 후에 다시 말한다; “먼저 가석방이 된 인물 가운데는 일종의 전향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어요. 저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무력항쟁을 하고 있는 서간도와 북간도의 한인촌을 은밀하게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북간도 용정 명동마을에서 오경덕 선생을 다시 만난 것이지요”.
오경덕 선생이 말을 보탠다; “사실은 3.1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를 두고서 저는 1919년 2월에 권동진 선생과 비밀리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북간도 저의 집 주소를 드리고 한번 시간을 내어 방문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 초청이 4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좌중의 인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떡인다.
그 모습을 보고서 권동진 선생이 다시 말한다; “오경덕 선생과는 그렇게 다시 연결이 되고 그 사이에 몇달간 서로 교감을 나누고 있었는데 지난 달에 갑자기 동경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 수천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사건이 발생을 했지요. 저는 그 전모를 좀 파악하기 위하여 오경덕 선생에게 급히 연락을 했더니 바로 경성으로 갈 터이니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더군요…”;
이번에는 오경덕 선생이 설명을 한다; “일본 동경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저보다도 부산에 살고 계시는 장인식 교장과 안성기 교장이 더 전문가이시지요. 그래서 저는 권동진 선생을 모시고 부산으로 두 분을 찾아갔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서 장교장과 안교장이 차제에 경주로 가서 성동의 사랑방모임에 참석하여 다같이 토론을 해보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무작정 찾아온 것이지요”.
말을 듣고 보니 이제서야 그들이 어떻게 한 무리를 이루었으며 어째서 사랑방모임을 찾아왔는지 이해가 된다. 그러자 좌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집주인 김춘엽 선비가 말한다; “잘 오셨습니다. 그런 일로 오셨다면 불감청 고소원입니다. 먼저 ‘관동대지진’이 언제 발생했으며 어째서 애매하게 조선사람들이 그곳에서 희생이 되고 있는지 좀 알려주십시오. 저희들도 그 상세한 내막이 정말 궁금합니다”;
안성기 교장이 설명을 시작한다; “저는 아들 안용운이 동경에서 쌀가게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문과 자료를 좀 보내 달라고 했더니 두가지로 수집하여 보내 왔습니다; 하나는, 신문에서 공식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비공식적으로 일본의 정치학자들이 거론하고 있는 견해들입니다. 그 가운데 신빙성이 있는 것은 전자가 아니고 역시 후자입니다”.
그렇게 전제를 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한다; “공식적인 신문보도에 따르면 그저 1923년 9월 1일에 동경을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으며 그 소동 가운데 일본인들과 조선인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여 조선사람이 몇명 희생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엄청나게 축소된 보도이지요. 그러므로 비공식적인 은밀한 정치평론가들의 견해가 필요합니다”;
모두들 귀를 쫑긋한다. 그때 안성기 교장이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본제국의 수도인 동경에서 그렇게 큰 지진이 발생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일제는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옛날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가 사용한 비책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비책이란 첫째로, 지진으로 발생한 일본식 주택인 목조건물에 대한 화재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떠넘기고 동시에 상수도가 끊어진 책임도 우물에 조선인들이 독을 타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선전함으로써 교묘하게 전가를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교한 일본사람들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또 하나는 무엇일까? 모두들 안성기 교장의 입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자 안교장이 명쾌하게 설명을 한다; “둘째로, 좌익의 기세를 꺾고 차제에 국수주의적인 우익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고자 획책한 것입니다. 그 점을 이해하자면 조금 정치사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안교장이 바로 설명을 한다;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일본의 명치원로들이 1868년 명치유신 때부터 열심히 일본 열도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한 결과 1912년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일본제국이 산업선진국의 대열에 확실하게 진입을 합니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의 왕조가 무너지고 민권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명치원로의 대를 이은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서양의 선진국처럼 민의를 적극 수용하여 정책에 반영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대정민주주의’이지요”. 참고로, 메이지 천황의 뒤를 이은 다이쇼 천황의 모습이 아래와 같다;
안교장이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이어서 말한다; “대정 시대인 1917년에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생한 이후 그 영향이 인접한 일본에 바로 미치게 됩니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좌익운동이 활발해지고 정치적으로 그 목소리가 커진 것이지요. 그러므로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이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삼아 좌익운동을 억제하고자 합니다. 그 방법이 국수주의적인 자경단을 앞세워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좌익이 발을 붙일 수가 없도록 사회적인 분위기를 일시에 우편향으로 만든 것이지요.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억울하게 조선인들이 많이 희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도대체 정치와 사상논쟁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가 아프고 잘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그러한 부인들의 표정을 보고서 장인식 교장이 옆에서 쉽게 설명을 한다; “제가 알기로는 그 와중에서 희생이 된 조선인들의 수가 일본의 신문에서 보도하고 있는 몇명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6천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동경의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만들어 낫과 칼 그리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일본인이 아니라 외지인으로 보이면 무조건 발음이 어려운 일본말을 해보라고 시킵니다. 발음이 이상하면 ‘죠센찡’으로 몰아서 그 자리에서 살해하고 말지요. 그래서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사람과 기타 사투리가 심한 지방 사람들이 많이 맞아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광기이다. 일본제국이 천재지변을 당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없다. 근본적인 문제를 따지자면, 서구화와 산업화를 급행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외국에서 가져다 쓴 차관이 너무 많아서 빚에 극도로 시달리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광기 가득한 국수주의 우익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결국에는 우익성향이 가장 강한 군대를 동원해서 약한 나라들을 잡아 먹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빚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나치즘이나 파쇼와 같다;
일본이 그러한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이며 일본정치인들의 그 이상한 수습방법이다. 그러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날 경주 성동 김춘엽 선비의 사랑방에서는 7명의 선비들과 3명의 부인들이 밤새도록 토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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