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94(작성자; 손진길)
1925년 을축년 7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 조선반도에 밀어 닥친 네 차례의 태풍과 그로 인한 강의 범람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집안이 서배 할배 손상훈의 가문이다. 그 이유는 내남 박달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거랑가의 땅을 3대가 근 100년간 집중적으로 개간하여 1,000마지기의 논밭을 일구어서 경작을 했기 때문이다;
거의 6할의 전답이 이조천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진흙과 자갈로 뒤덮이고 말았기에 그것을 복구해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해 추수가 절반 남짓에 불과하여 생계가 어려워진 일가들과 소작인들을 먹여 살리는데 우선 재물을 쏟아 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배 할배가 비축을 하고 있는 곡식으로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논문서를 가지고 경주의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현식을 찾아간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답 가운데 내남 이조에 가까운 것을 100마지기만 사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러자 최 가주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희 가문이 내남 이조에서 경주 교리로 이사를 하여 만석꾼의 재물을 모은 이유는 제7대 가주였던 최언경 곧 저의 고조부께서 경주 월성 일대의 소작인들 가운데 굶는 자가 없게 만들겠다고 하는 숭고한 이상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에서 밥을 굶게 되는 농민들이 발생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저희들이 앞장을 서야만 하는 구휼 사업입니다”.
가주 최현식도 70대의 노인이라 힘이 드는지 잠시 숨을 돌리고서 말한다; “그런데 서배 할배께서 자신의 소작인들을 살리겠다고 먼저 구휼활동을 하시고 이제 구휼미가 더 필요하여 문전옥답을 저희들에게 파시겠다고 찾아오셨으니 저희들이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의 곳간을 더 열어서 구휼을 할 터이니 전답문서는 도로 가지고 가시지요…”.
그러자 서배 할배 손상훈이 말한다; “최가주의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지만 내남 형산강 유역 이조천변에 있는 가주의 전답도 피해가 막심한데 어떻게 그 모든 구휼을 감당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흉년이 들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전답을 사모으지 아니한다고 하는 교리 최부자의 가훈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내놓은 전답문서는 소작인의 것이 아니라 그래도 내남 너븐들에서 천석꾼 소리를 듣던 제 집안의 문서입니다. 그러하니 이 문서를 받고서 곡식을 파시는 것이 정당합니다”.
최현식 가주가 ‘허허’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서배 할배는 저보다 3살이나 연상이시고 제가 존경하는 지주이십니다. 이번 태풍과 홍수로 정말 전답이 반 토막이 난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답까지 팔아서 일가와 소작인들을 살리겠다고 하시니 그 마음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므로 필요하신 곡식의 절반은 제가 그냥 드리고 제게 주신 전답문서 가운데 절반 50마지기의 땅만 받고 나머지 곡식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마음이 후련하시겠습니까?...”.
서배 할배 손상훈이 ‘껄걸’ 웃으면서 말한다; “역시 조천 최부자는 하늘이 낸 부자가 맞습니다. 저의 소작인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스스로 절반의 구휼을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니 제가 일가를 대표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자주 찾아 뵙지를 못하더라도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최 가주님”.
그날 최현식 가주는 문간까지 따라 나와서 서배 할배를 배웅한다. 그도 일흔을 넘긴 노인이라 다시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고서 손상훈은 최현식의 손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쥐었다고 놓으면서 길을 재촉한다. 경주 교리에서 내남 너븐들까지는 족히 25리나 되는 먼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치가 있었기에 1926년 봄의 춘궁기를 잘 넘기게 된다. 그러자 서배 할배 손상훈이 일가와 소작인들에게 중요한 선언을 한다; “저희 집안은 3대에 걸쳐서 거랑가의 땅을 개간하여 천석꾼의 살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6할의 땅이 다시 하천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땅을 저희 가문이 힘이 있으면 다시 개간을 하여 여러분에게 소작을 하도록 드리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잠시 숨을 쉰 다음에 손상훈이 말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개간을 하여 자신들의 논밭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집안은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동안 저희 집안의 전답을 잘 경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내남 월성 손씨 부락의 가주로서 서배 할배가 일가들은 물론 여러 소작인들에게 고별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깨끗하게 하천유역으로 변하고 만 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여력이 있는 소작인들이 그 땅을 개간하여 자신들의 농토로 삼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러한 조치가 있어야 그들이 열심히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서 내년부터 굶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한 결정을 하여 선포를 하고 나자 서배 할배의 집안에 작은 경사가 생긴다. 1926년 4월 25일에 네번째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며느리 정애라가 낳은 5번째 손주이며 4번째 손자이다. 76세의 서배 할배가 기뻐하면서 그 이름을 ‘손수권’이라고 짓는다. 그 의미는 “서배 할배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였더니 하늘이 그 보상으로 주신 귀한 손자”라는 것이다;
며느리 정애라와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한 손영한의 부인 이신자는 5일이 늦은 4월 30일에 아기를 출산한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득남을 그토록 바랐는데 또 딸이다;
그러나 손영한은 득녀를 한 산모를 위로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그 동안 참으로 애기를 낳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제는 40이 넘은 나이이니 그만 낳으셔도 되요. 딸 넷을 잘 키워서 아들 부럽지 아니하게 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동생 집안에 아들이 넷이 되었으니 하나를 우리에게 양자로 주지 아니 하겠어요…”.
그 말을 들은 이신자는 한편으로는 남편 손영한의 마음씀씀이가 고맙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다. 끝까지 아들을 낳지 못한 자신을 위로하는 말씀이니 그것이 고맙다. 하지만 자신이 아들 하나를 남편에게 낳아 주지를 못하여 양자를 들이도록 만들고 말았으니 그것이 참으로 미안한 것이다.
손영주는 형수가 또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아내 정애라와 그날 저녁에 말을 나눈다; “여보, 형님이 이번에도 득녀를 했다고 하는 군요. 당신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우리가 이제는 아들이 넷이나 되었으니 나중에 하나를 형님 댁에 양자로 보내 드립시다.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살게 되는 것이니…”.
그 말을 듣고서 정애라가 말한다; “그렇게 하세요. 훗날 형님이 요청을 하면 그렇게 조치를 하세요. 그리고 저는 아직 40이 되지 않았으니 아들을 더 낳을 거예요. 아버님과 당신이 힘이 부족하여 다시 천석꾼의 재산을 되찾지 못할 것 같으니 제가 아들을 많이 낳아서 그 일을 하도록 하겠어요”.
그 말을 들은 손영주는 사랑하는 아내 정애라가 강단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재산을 이룰 여장부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손영주 자기보다 7살이나 어리지만 그 결심이 단단하기가 보통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손영주는 아내 정애라 곧 ‘봉천댁’을 사랑하면서 또한 자기도 모르게 크게 의지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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