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9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7. 13:08

서배 할배96(작성자; 손진길)

 

1926년초에 서배 할배 손상훈은 동네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전답문서를 가지고 경주의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현식을  찾아간 적이 있다. 1925년 7월 초순과 9월 초순 사이에 발생한 을축년 대홍수의 피해로 월성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신의 일가와 소작농들이 양식이 부족하여 춘궁기를 버티기 힘들게 된다. 그에 대비하여 지주인 서배 할배가 자신의 땅을 일부 팔아서 이웃을 구휼할 양식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내남 너븐들 그의 집에서 경주 남쪽 남천내 옆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교리까지는 편도로 25리 길이다. 그날 왕복을 했으니 하루에 50리길을 걸은 셈이다. 당시 76세의 노인 서배 할배로서는 상당한 무리였으나 고향사람들을 살려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먼 길을 다녀온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논 50마지기를 처분하여 고향사람들을 기아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 다음에는 하천이 범람하여 진흙과 자갈로 뒤덮이게 된 자신의 논과 밭을 동네사람들에게 여력이 되는 대로 개간하여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을 했다. 그것은 서배 할배가 하천유역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전답에 대하여 어떠한 소유권이나 연고권도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조금만 되돌아보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에 따라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자 일제는 가장 먼저 1918년까지 전국의 토지에 대하여 개인이름으로 소유등기를 완료하라고 포고를 한다. 토지에 대한 근대화를 이룬다는 명분으로 그렇게 조치한 다음에는 미처 개인소유로 등기를 하지 아니한 토지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가 몰수를 하고 만다;

그리고 일제는 조선사람들의 경작지를 차지하고자 벌써 1908년에 설치한 ‘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그 몰수한 토지를 넘겨서 대신 관리하도록 한다. 그에 따라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무산자인 일본인들을 조선에 끌어들여서 그 토지를 소유하도록 일종의 ‘식민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졸지에 경작지를 빼앗긴 조선의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아 간도로 이주를 하게 된다;

참고로, 1920년까지 조선총독부가 몰수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긴 토지의 규모가 당시 조선반도 전체 경작지의 3분의 1이나 되는 9만 7천여 정보이다. 그 때문에 전답을 빼앗기게 된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간도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된 것이다;

간도를 비롯한 만주 땅은 본래 청국의 왕조가 발흥한 곳이다. 그들은 명나라를 치고 중원을 정복하여 그곳으로 이주를 하면서 만주를 조상들의 땅이라고 하여 중원사람들의 거주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 때문에 오랜 세월 빈 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의 왕조가 무너지자 자연히 조선반도와 인접한 간도지역에 대한 청국의 통제권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조선에서는 1925년 을축년 태풍과 대홍수로 말미암아 엄청난 이재민이 발생한다. 조선총독부는 아무런 구휼활동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조선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또 간도로 떠나간다. 그 결과 1926년까지 30만명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게 되고 1945년 해방 전에는 그 규모가 150만명에 달하게 된다.

일본은 그렇게 가로챈 조선의 경작지를 일본인들에게 주어 조선에 일본인 정착촌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그 이유는 조선의 경작지를 공짜로 받은 일본인들이 전부 조선인에게 소작을 주고 지주 노릇을 하는데 재미를 붙이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국에 흩어져서 지주로 살거나 아니면 조선인에게 소작만 주고 일본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만다.

그에 따라 일본인 정착촌을 만들 필요가 없어지므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26년경 더 이상 일본인 식민정책을 추진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 농업이 아닌 다른 공업분야의 사업에 자본참여를 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45년 해방전까지 조선의 임야를 16만 정보나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공업적인 이익까지 향유한 것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불쌍하게도 그러한 일제의 착취를 당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가혹한 착취의 시대를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을 서배 할배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이미 늙어버린 자신은 그렇다고 치지만 아들 손영주 내외와 5손주의 앞날이 걱정이다. 그들이 살아갈 날들은 자신이 고생한 날들보다 분명히 더욱 힘들어 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걱정으로 1929년 한해를 힘들게 보내고 있는 서배 할배 손상훈이다. 그렇지만 79세나 되어 늙어버린 손상훈의 옆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이채령이 함께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로이다. 손상훈 자신보다 5살이 적으니 그녀가 74세이다. 자신은 내년이면 80세가 된다. 70세를 ‘고희’라고 부르고 있는 시대에 그들 부부는 오래 살고 있는 것이다.

서배 할배는 사랑하는 아내 이채령이 자신보다 5년쯤 더 살게 될 것으로 짐작을 한다. 자신이 80수를 누리게 된다고 하면 그녀도 그 정도는 장수를 누리지 아니하겠는가? 그 점을 생각하고서 1929년말에 자신이 조선의 나이로 80세가 되기 전에 서배 할배 손상훈이 아내 이채령에게 조용하게 말한다; “여보 어느새 내 나이가 다음달이면 새해가 되고 80살이 됩니다. 예부터 드물다고 하는 나이 ‘고희’를 넘긴지도 10년이나 됩니다. 이 정도 살았으니 오래 산 것이지요…”.

말을 하자 마음속이 격앙이 되는지 조금 진정을 한 다음에 손상훈이 이어서 말한다; “선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천석꾼 살림을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주지를 못하고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반토막난 것을 물려주게 되니 조상님 보기에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나는 자손들이 잘되어 다시 집안이 옛날처럼 일어서는 모습만은 보고 싶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것만은 보고 싶습니다…”.

80살이 다 되어가는 서배 할배 손상훈이 울먹이고 있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 75살을 목전에 둔 아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락 깊숙한 곳에서 옷감으로 싸여 있는 것을 하나 찾아 내어 아내 이채령에게 조용하게 내민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채령이 펼쳐 보니 조선은행권 지폐 꾸러미인데 그 금액이 상당하다. 깜짝 놀라고 있는 이채령에게 남편 손상훈이 말한다; “여보, 나는 이달이 지나 새해 1930년이 되면 내 나이 80이 되어요. 더 이상 버티고 살 자신이 없소. 기력이 약해져서 밤에 잠이 들기 전에 내일 아침에 어디서 깨어나게 될지, 그리고 내가 깨어났을 때에 내 옆에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항상 걱정이 된다오. 이제 갈 때가 가까워진 것 같소…”.

서배 할배 손상훈이 숙연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그래서 내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마련해 둔 비상금을 이제 당신에게 맡기려고 해요. 그 금액은 대략 논 10마지기 값이 될 것이요. 당신이 나 대신 남은 여생을 살다가 꼭 필요한 곳에 사용을 하도록 하세요. 그 정도 밖에 당신에게 남겨주지를 못하여 미안하구려. 천석지기 집안의 외아들인 나에게 시집을 왔는데 내가 불민하여 크게 호강을 시켜주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참으로 미안하구려…”.

그 말을 듣고서 이채령이 말한다; “여보, 나는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항상 부자인 여자였어요. 이 세상에 당신 외에는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없었답니다. 당신은 80평생을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해준 유일한 내편이었지요. 당신이 떠나고 나면 나도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제 자손과 후대를 위하여 꼭 필요한 곳에 이 돈을 사용하라고 맡겨주시니 그 부탁만은 제가 실천하고 당신을 따라갈게요…”.

조용히 둘이 누워서 조근조근 말을 나누던 그때가 1929년 12월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고나서 새해가 되자 서배 할배 손상훈의 아침 기상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 그러다가 보름이 지나 1930년 1월 16일이 되자 그만 아침에 깨어나지를 않는다. 참으로 편안하게 아내 이채령의 옆자리에서 잠을 자다가 생을 마친 것이다.

내남 너븐들에서 가장 큰 초상이 난다. 4년반 전에 대홍수가 나서 재산이 반도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서배 할배 손상훈은 고향에서 오랜 세월 천석꾼으로 살아온 월성 손씨의 가주이다. 그리고 100세대나 되는 소작농들의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 장례는 내남 너븐들이 생기고 가장 큰 초상행사가 되고 만다. 특히 농한기이므로 초상을 치르기에 시기적으로 불편함이 없다.

그래도 손영주는 동네사람들에게 많은 고생을 시키고 싶지가 않다. 따라서 장례를 3일장으로 하고 산소는 가까운 상신의 선산에 쓰기로 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친형 손영한이 자신의 일처럼 아우를 도와주고 있다. 그래서 1930년 1월 18일 오전에 발인하여 상여가 너븐들 뒷산으로 올라간다. 모든 너븐들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그리 멀지 아니한 산지에 서배 할배 손상훈의 산소가 생기고 있다;

그때부터 49일 동안 이채령은 며느리 정애라와 함께 정성스럽게 상식을 올린다. 마침내 3월 8일이 되자 47세가 된 아들 손영주가 가족들과 함께 선친의 산소에 올라가서 49제를 드린다. 그 자리에 친형 손영한의 가족이 함께한다. 그 산소에는 경주 돌공장에서 맞추어 설치한 상석 돌 하나만이 놓여 있다. 그 위에 가지고 온 음식을 차리고 술을 부어 드린다;

가족과 함께 손영주가 선친의 산소에서 재배를 하고 나서 따로 준비해온 탁배기를 사발에 가득 부어 산소 주위에 뿌린다. 서배 할배 손상훈이 평소에 정종보다는 탁배기를 더 좋아하신 것을 그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영주는 6살 꼬마때부터 7촌 숙부인 서배 아재 손상훈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40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아들이다.

특히 그가 서배 할배로부터 배운 것이 너무나 많다. 진실로 아버지는 농사꾼이셨고 동네사람들과 일가를 끔찍하게 섬긴 어른이시다. 그러므로 그 뒤를 이어 자신도 능력이 닿는 한 일가와 동네사람들을 돌보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제는 천석꾼이 아니라 4백석지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가족을 먹여 살리고 일가와 동네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자신이 모든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거듭 선친의 묘소에서 맹세를 하고 있는 손영주이다.

그러한 동생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말없이 그의 형 손영한이 함께 하산을 한다. 1930년 3월 조선의 강산에도 봄이 오고 있지만 손영주와 그 모친 이채령의 마음에는 서늘한 바람이 계속 불고만 있다. 그리고 5자식의 어미인 정애라는 그 뒷바라지에 바쁘다. 하지만 올해 18세가 된 딸 손해선이 모친을 도와서 동생들을 잘 돌보아 주고 있어서 그것이 정애라에게는 큰 힘이다. 역시 맏딸은 옛날부터 ‘살림 밑천’이라고 했던가?...

[이상으로 ‘서배 할배’편이 끝나고 그 다음 이야기는 ‘봉천 할매’편으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