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5(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3. 12:05

서배 할배5(작성자; 손진길)

 

내남 양삼 마을에서 서당의 훈장을 맡고 있는 인주 이씨 이덕화 선비는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유교의 경전을 읽고 해석하며 또한 시문을 읽고 한시를 짓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그가 한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하는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책에서부터 사람이란 무엇이며 하늘의 뜻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한길 속도 알 수가 없는 인간의 속성을 나름대로 깨닫고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이 제격인 것이다. 또 하나는, 청나라로부터 암암리에 수입이 되고 있는 그곳의 선각자들의 글들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100년전 영정조때부터 북학이라는 이름으로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서적을 통하여 조선의 선비들이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청나라를 다녀온 조선의 실학자들이 남기고 있는 글들이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가히 충격적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전통적으로 명나라에 이어서 중국의 청나라를 세상의 중심으로 알고서 오랜 세월 사대주의에 젖어서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황제보다 더 힘이 세고 청나라보다 더 문물이 발달한 세상이 서양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구의 문물을 일찍 받아 들인 일본이 욱일승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종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의 오랜 세도정치가 끝이 나자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는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서양의 학문을 토론하는 모임들이 지방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천주교의 영향과 은밀한 선교사들의 활약이 지방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영향이 수구적인 보수 양반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경주 일원에도 스며들고 있다.

더구나 10년간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1873년에 민비와 고종에 의하여 정권을 내놓고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새로운 개화사상이 조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의 동쪽에 있는 섬나라 일본이 1868년에 명치유신이라는 혁명을 하고 그때부터 정책적으로 서양문물을 도입하면서 일본 열도가 근대적인 모습으로 급속하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일본이 서양의 나라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일본에 서양문물을 전해주고 있는 서구의 기술자들과 선교사들도 깜짝 놀라고 있다. 자본주의가 조기에 정착이 되고 일본의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는 과거 수백 년간 지속이 된 막부정치의 영향으로 보인다.

에도의 막부는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하여 2년간은 영지에서 살고 그 다음 2년간은 반드시 에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야만 한다는 소위 참근교대제도’(상낀교오따이세이)를 강요한 것이다. 그 때문에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들은 가족들을 에도에 인질로 남겨두고서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매년 중앙으로 보내야만 했다.

더구나 매 4년의 절반은 자신도 에도에서 살아야 하므로 더 많은 물자를 중앙으로 운반해야만 한다. 그 일을 다이묘 대신에 수행을 한 집단이 바로 일본의 상인들이다. ‘죠오닝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들 상인집단들은 일본을 경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전국적인 새로운 계급이다. 그들이 명치유신 직후부터 명치원로들에 의하여 착실하게 추진이 되고 있는 일본 열도의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주역이 되고 있는 것이다.

벌써 토착적인 자본의 축적은 물론 물자수송을 위한 전국적인 도로망이 그들 상인들에 의하여 갖추어 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지방의 토속적인 명품 생산이 많은 명장들에 의하여 일촌일품운동으로 전개가 되고 있다. 나아가서  일본의 죠오닝들이 전국적인 환 사용이라는 놀라운 금융망까지 갖추고 있으므로 일본의 자본주의화는 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컨대, ‘죠오닝들이 일본의 산업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까지 종주국으로 섬기고 있는 조선의 상황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중국의 왕조는 황제정치를 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세력에 대해서는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일체 불허하면서 엄중한 통제와 감시를 가하고 있다. 그들이 서구의 선진문명을 스스로 받아 들여서 부자가 되고 강한 군대를 양성한다면 황제정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를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속국들의 신세도 마찬가지이다. 쇄국을 해야 하고 국제적인 교류는 오로지 주군의 나라인 황제의 나라를 섬기는 기본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조선은 서양과 이웃나라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무지하며 소위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은둔의 나라이다. 그저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에 젖어 있으며 청의 왕조가 시키는 일만 하늘의 명령으로 알고서 국가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그러한 위성적인 성격의 나라에 불과한 것이다.

고종이 즉위한 때에는 청나라가 벌써 20년전에 서구와의 전쟁에서 대패를 하고 동해안의 땅을 일부 떼어주면서 아편까지 받아 들이고 있다. 한마디로, ‘종이 호랑이가 되고 말았는데 조선의 왕조는 그 사실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한심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암암리 그러한 진실을 일부 깨닫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은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우국지사 중의 한 사람이 인주 이씨인 내남의 시골 훈장 이덕화이다.

이덕화가 실사구시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은 다분히 그의 집안의 내력 때문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조상은 금관가야의 왕족이다. 신라에 의하여 금관가야가 존망의 위기에 서게 되자 532년에 구형왕이 스스로 항복을 하고 신라의 법흥왕의 배려로 신라의 진골인 귀족으로 편입이 되어 경주에서 살게 된다. 그 손자가 김서현 장군이며 그가 법흥왕의 질녀인 만명 옹주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그 유명한 김유신 장군이다. 어쨌든 김서현과 김유신은 김해 김씨이다.

그와 달리 신라에 대하여 반골인 금관가야의 왕족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를 버리고 다른 성씨를 가지고 살게 된다. 그 가운데 한 갈래가 인주 이씨이다. 그렇게 인주 이씨가 월성군에서 살게 되는데 그 후손이 훈장선생인 이덕화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지나가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잊어버리고 혈육간에 서로 하나가 되어 한 마을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조선시대에 외동의 서배 마을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신라의 왕족인 경주 김씨의 자손들과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해 김씨의 후손들은 물론 그 노선을 달리했던 인주 이씨의 자손들이 신라시대의 갈등을 해소하고 더불어 물이 좋은 서배 마을에서 이웃하여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한학을 통하여 역사를 깊숙하게 배우고 있는 선비 이덕화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역사의식이 투철하다. 그는 그 옛날 조상들의 반골의식을 유전자로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다 쓰러져 가는 청나라의 황제를 여전히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대원군과 그 지지세력들에 대하여 실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면에 조선도 국제정세에 눈을 뜨고 구미지역과도 교류를 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자주적인 개방과 개혁노선에 대하여 은근히 찬성을 하고 있는 인사인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읽고서 조선의 나아갈 방향까지 마음에 정리하고 있는 선각자 이덕화의 눈에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개천가의 땅을 전부 개간하여 새로운 천석꾼 지주로 등장하고 있는 손성규의 집안이 들어오고 있다. 그 집안의 외아들이 손상훈인데 그가 17세에 서당을 졸업하고서도 시간만 나면 자신을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영민한 이덕화는 사제간의 정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제자인 손상훈의 눈에서 읽고 있다. 상훈이는 스승의 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덕화도 여러모로 손상훈의 사람됨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중이다. 아직 손상훈이 부친과 함께 거랑가의 돌밭을 개간하는 일에 전념을 하느라고 혼사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덕화의 딸의 나이가 18세가 되자 손상훈의 부친이 마침내 천석꾼이 되고 있다. 이제는 천석꾼 집안의 외아들인 손상훈이 결혼을 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그 점을 알고서 이덕화는 자신의 집을 더 자주 찾아 오고 있는 제자 손상훈의 행동을 더욱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영 답답한 제자이다. 자신이 자리를 피해주고 딸과 둘이서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은근히 마련해주어도 숫기가 없는 손상훈이 여전히 얼굴만 붉힐 뿐 딱 부러지게 혼사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신이 손상훈의 부친인 천석지기 지주 손성규를 별도로 만나야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다른 장소에서 손성규를 만날 수가 있을까? 그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오르고 있다. 그것이 매번 경주 오일장에 가는 손성규와 자연스럽게 동행을 하는 방법이다. 2일과 7일 열흘에 두차례 경주 오일장에서 만나는 각 지역의 시골 사람들은 그곳에서 서로 탁배기를 나누면서 각 지역의 정보를 공유한다. 그리고 시장의 상인을 통하여 경주와 더 넓은 지역의 정보를 얻는 것이다.

천석지기 부자인 손성규가 경주의 오일장을 빠지지 않고 방문하고 있다. 세상의 정보에 밝아야 손해를 보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귀가 밝아야 하므로 그는 필요한 정보를 경주 오일장에서 가장 많이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주 손성규의 행동과 습관을 파악한 훈장 이덕화는 이제 경주 오일장에서 자연스럽게 그와 탁배기를 나누면서 손상훈과 그의 딸과의 혼사문제를 의논해보고자 한다. 그 참 좋은 생각이다. 이덕화는 당장 실천에 옮기고자 서두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