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3. 12:08

서배 할배6(작성자; 손진길)

 

내남 상신의 너븐들은 경주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마을이다. 경주의 남쪽 변두리 황남에서 출발하여 울산과 언양으로 가는 신작로를 타고서 20리 정도를 걸으면 우선 내남면의 그 옛날 행정중심지인 용장을 만날 수가 있다. 오늘날은 경주교도소가 그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명이다.

용장에서 너븐들까지 가자면 이조에서 다리를 건넌 다음 서쪽으로 십리길을 더 걸어가야 한다. 형산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이조에서 높고도 긴 다리를 건너가면서 좌우를 내려다보면 이조천변에 자갈이 많고 그 유역이 상당히 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북으로 넓은 경작지가 펼쳐진다. 역사적으로 개모듬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지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든 집안이 바로 조천 최부자 가문이다. 따라서 그 드넓은 논과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내남의 많은 사람들이 이조리와 덕천리에 살고 있다. 오늘날은 면사무소까지 그곳으로 이전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

덕천리를 지나 서쪽으로 계속 걸어가다가 보면 시골마을들이 뚝뚝 떨어져서 하나씩 나타난다. 그 마을들의 순서가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이다. 박달이 마지막 마을인데 그 이유는 높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가장 높다는 827미터의 단석산과 낮은 소두뱅이산 등이 내남면과 산내면을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첫 관문인 건천읍에서 남쪽으로 산행을 하여 단석산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 건너편에 내남의 박달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그만큼 오지마을이 박달이다. 하지만 여러 겹의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의 물을 보에 가두고 모아서 농사를 짓고 있어 박달과 안심 그리고 상신의 경작지가 상당히 넓다. 오늘날에는 주위의 경관이 좋아 도회지사람들이 특히 박달에서 전원생활을 즐기고자 한다.

그 옛날 고종시대에는 박달과 안심 그리고 상신에 살고 있는 내남 사람들이 경주시내의 오일장을 가자면 30리길을 줄곧 걸어서 가야만 한다.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소달구지를 타고서 가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양식이나 장작을 운반하는 때 뿐이다. 농사를 짓는 귀한 소를 먼 길에 짐을 운반하고자 함부로 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심의 서당훈장인 이덕화는 경주시내의 오일장에 가고자 아침 일찍 길을 나서고 있다. 그는 40대의 장정인지라 그 30리길을 보통 2시간반만에 주파를 한다. 하지만 그 날은 마음이 바쁘다. 빨리 장에 가서 손상훈의 부친인 천석지기 지주 손성규를 만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둘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의 발걸음이 상당히 빨라져서 2시간 남짓 만에 경주의 웃시장에 들어서고 있다.

내남에서 경주로 곧장 걸어오면 탑정리와 황남을 지나 경주의 성건동에 있는 아랫시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서당훈장인 이덕화는 훗날 경주역이 들어서게 되는 지역 곧 성동 가까이에 있는 웃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 이유는 지주인 손성규가 경주의 오일장에 오면 주로 웃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손성규는 의도적으로 내남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는 아랫시장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보를 진작에 수집한 이덕화는 지주인 손성규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행보가 동네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그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지의 이야기를 많이 듣자면 오늘날의 경주 역 앞에 있는 웃시장이 제격이다. 포항과 불국 쪽의 사람들이 웃시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손성규가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내남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소에 고향에서 많이 듣고 있으므로 경주 오일장에 와서까지 들을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서당 훈장인 이덕화는 손상훈의 부친인 손성규가 탁배기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지라 웃시장의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를 뒤지고 있다. 마침 하나의 포장마차에서 고래고기 한 접시를 놓고서 몇 사람과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고 있는 지주 손성규를 발견했다. 아직 정오가 멀었는데 낮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순전히 사람들과 쉽게 사귀고 그들이 전하고 있는 외지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덕화 훈장이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지주 손성규가 얼른 알아챘다. 따라서 말로 인사부터 건넨다; “훈장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서 존안을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 장날에는 어떤 소간이 있으신지요?”. 평소 경주 오일장에서 그가 훈장 이덕화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너무 생소하고 반가워서 건네고 있는 인사말이다. 그리고 지주인 손성규의 입장에서는 이덕화가 자신의 외아들인 손상훈을 3년이나 가르친 선생이기 때문에 깍듯하게 선생의 대접을 해주고 있다.

이덕화는 내심 지주 손성규를 만나게 된 것이 반갑기 그지 없다. 그가 일부러 경주 오일장을 찾은 이유가 그를 만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비인 그가 함부로 내색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점잖게 마주 인사를 한다; “오늘은 참 제가 운이 좋은 날입니다. 여기서 손상훈의 아버님을 뵙게 되니 말입니다.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제가 문안이 늦었습니다”. 참으로 예의가 바른 인사말이다.

평소 지주인 손성규가 일부러 훈장선생인 이덕화를 만난 적이 없다. 그는 지금까지 거랑가의 땅을 논으로 개간하는데 오십 평생을 바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23세인 외아들 손상훈이 서당을 졸업한지도 6년이나 지났다. 물론 아들이 서당의 공부를 수료한 그때에는 부친인 손성규가 시간을 내어 참석을 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젊은 서당훈장인 이덕화에게 예의를 갖추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너븐들에 살고 있는 손성규가 일부러 안심에 있는 양삼마을의 서당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리고 훈장인 이덕화도 늘 서당과 집에서 글을 읽으면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은 편이다. 더구나 상신 너븐들에 있는 지주 손성규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이력이나 성품에 대해서 사실은 깊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날 경주의 웃시장 오일장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꽃을 피우게 된다. 물론 그날의 만남은 이덕화로서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딸을 손상훈에게 시집 보내기 위하여 상훈의 부친인 손성규를 한번 만나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주인 손성규는 그것이 아니다. 아들이 이 훈장의 딸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지라 뜻밖에 이덕화를 만난 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탁배기를 서로 나누면서 이 훈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식견이 보통이 아니다. 때는 1874년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민비의 도움을 받은 고종이 친정을 막 시작한 직후이다. 척사를 부르짖으며 쇄국정책을 강행하던 대원군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이제는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다들 수군거리고 있는 때이다. 과연 조선은 개화의 길로 접어들 것인가? 아니면 다시 나라의 빗장을 잠그게 될 것인가? 백성들의 당면한 관심사가 그것이다.

지주 손성규는 50평생을 논밭을 일구는 일에만 전념한 사람이므로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지식이 없다. 따라서 유식한 훈장 이덕화에게 그날 그 점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이 훈장의 설명이 탁견이다. 이씨조선이 성립이 된 1392년부터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난 시점까지 500년 가까이 조선의 왕은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를 차례로 주군으로 섬기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모든 국제간의 교류는 황제의 나라하고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다른 나라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다는 이 훈장의 설명이다.

이 훈장은 지금의 국제정세는 그 옛날과는 확연하게 다르다고 한다. 청나라보다 더 문물이 발달하고 군사력이 강한 나라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큰 상선과 전함을 몰고서 일본과 청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들이 옛날에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어 전혀 조선과 교류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아니라는 이 훈장의 설명이다.

그의 설명을 듣고서 손성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부인 손사설로부터 시작하여 부친 손성익을 지나 이제 손성규 자신에 이르기까지 3대가 거의 100년 세월을 매어 달려서 천석지기의 꿈을 달성했더니 그만 시대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청나라의 황제와 조선의 왕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만큼 손성규는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의 식견과 경륜에 감탄을 하면서 이 사람이 앞으로 자신의 외아들 손상훈의 선생이 되어 천석지기 재산을 지키고 경영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이덕화의 확신에 찬 설명이 끝나갈 즈음에 신중하게 한마디를 한다; “참으로 탁견이십니다. 훈장선생께서 그 정도로 식견이 높은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옛날부터 선비는 3일만에 만나면 전혀 다른 경륜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그동안 개간사업에만 매어 달려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저나 저의 아들놈에게 아무쪼록 좋은 스승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다음 오일장날에도 여기서 만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덕화는 지주 손성규가 참으로 소탈하고 진솔한 성품의 사람인 것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는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비록 손아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배우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있다.

손성규의 인품에 탄복을 하고서 훈장 이덕화가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있다; “시골 선비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제가 상훈이 아버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그러면 다음 오일장에 여기서 다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저의 말만 했으니 다음에는 상훈이 아버님의 말씀을 제가 경청하겠습니다”.

이덕화는 첫만남의 자리인지라 딸의 혼사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소득을 얻었다. 손성규라고 하는 인생의 선배를 좋은 친구로 얻은 것이다. 그래서 오일 후에 다시 경주 웃시장에 나와서 고래고기를 안주삼아 지주 손성규와 담소를 나눌 그러한 기쁨을 안고서 내남으로 30리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인생길에 있어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벗으로 만난다고 하는 것이 어디 그렇게 흔한 일인가? 그러한 벗을 우연히 한사람 만나게 되었으니 훈장 이덕화의 발걸음이 흥겹고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