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8(작성자; 손진길)
교리 최부자 집의 사랑채에서 식객으로 있는 서배 마을의 선비 이종흠이 하인의 전갈을 받고 그 집의 주인인 최만희의 사랑방으로 건너오고 있다. 최만희는 그를 잘 알고 있지만 손성규로서는 초면이다. 언뜻 보기에 손성규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고 선비다운 지적인 모습의 풍채를 지니고 있다.
식객인 그는 사랑방에 자리를 잡으면서 먼저 가주인 최만희에게 절부터 한다. 나이는 최만희가 아래이겠지만 이종흠 자신이 신세를 지고 있는 집의 가장이 최만희이므로 절부터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진실되어 보인다. 그만큼 최만희가 여러 식객들에게 인심이 후하고 진심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자 최만희가 반절로 그에게 마주 인사를 하면서 입을 열고 있다; “저의 옆자리에 앉아 계시는 이 분은 제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형님이십니다. 내남 상신의 천석꾼 손성규 지주이시지요”. 그 말을 듣자 식객인 이종흠이 먼저 손성규에게 절부터 하려고 한다. 그러자 손성규가 그에게 손을 내저으면서 황급히 만류를 한다; “아이구, 우리는 서로가 초면입니다. 저는 이 선비로부터 절을 받을 입장이 아닙니다. 서로 나이가 비슷한 것 같으니 맞절을 하겠습니다”.
이종흠은 상대가 맞절을 하자 그 동안에 실눈으로 손성규의 모습을 살핀다. 분명히 자신과 같은 50대의 연령이다. 그리고 그 손이 투박한 것을 보니 농사일을 억척스럽게 하는 촌부이다. 그런데 그가 천석꾼지기라고 하니 그것이 놀랍다. 어째서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가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에게 소개를 시키고 있는 것일까?
마치 선비 이종흠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가주 최만희가 먼저 설명을 한다; “오늘 손성규 형님과 제가 이종흠 선비를 만나보고자 한 것은 한가지 여쭈어 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입니다. 혹시 내남 안심에서 서당 훈장으로 계시는 이덕화 선비를 알고 계십니까? 저희들이 알기로는 그 분이 서배 마을 출신입니다”. 그 질문이 있자 선비 이종흠은 금방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알다 뿐입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손성규가 이 선비에게 말을 건넨다; “어떻게 잘 알고 계시는지 좀 설명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종흠은 빙긋이 웃음을 띠면서 천천히 말하기를 시작한다; “그는 저보다 제법 연하인 고향의 선비인데 그의 집이 제 집에서 크게 멀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그는 저의 일가붙이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덕흠이는 영특하고 학문이 뛰어나지만 자신의 집안일과 관련이 되어서 그 생각이 일반 선비들과는 좀 다른 인물이지요”.
도대체 이덕화가 다른 선비들과는 어떤 특이사항이 있다는 말인가? 최만희와 손성규는 그날 이종흠 선비로부터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덕화의 본래 이름은 이덕흠이라는 좋은 양반 이름인데 그가 10년전에 한양을 다녀온 다음부터 그 양반 이름 대신에 스스로 평범한 민초들의 이름 이덕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행동은 다분히 그의 부모가 동학사상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선비의 입에서 동학이라는 말이 나오자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가 내심 놀라고 있다. 왜냐하면, 200년전에 내남 이조의 천변의 땅을 개간하여 최부자의 부를 크게 이룬 최국선의 삼촌이 최동길인데 그가 바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리 최부자의 시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후손의 한사람이 최제우이다. 그러므로 교리 최부자의 사람들은 비록 동학의 교도는 아니지만 동학교도들에 대하여 일종의 친밀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제우는 손성규와 같은 1824년생이다. 그는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하고 경주 일원에서 포교활동에 나섰는데 그 성과가 대단했다. 갑자기 3000명의 백성이 동학사상을 받아 들이고 날로 그 교세가 커졌다. 1863년말에 한양에서 그 정보를 접한 실권자 흥선대원군은 깜짝 놀랐다. 민심이 천심이라며 당당하게 철저한 민본주의 정치를 요구하고 있는 그들을 내버려두면 조선의 왕실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세무민을 하면서 백성의 무리를 규합하고 있는 반도 최제우를 잡아들이라고 대구감영에 강력하게 지시했다. 그 결과 대구 감영에 잡혀간 최제우는 1864년에 안타깝게도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경주 현곡 사람인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사상은 그의 죽음으로 땅에 묻히지 아니하고 도리어 민초들 사이에 은밀하게 더욱 퍼져 나가게 된다. 그 이유는 세가지 너무나 매력적인 사상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가 시천주 사상이다. 둘째가 인내천 사상이다. 셋째가 유불선과 서학을 대신할 수 있는 이론적인 간편성이다.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첫째, 시천주의 사상은 인도의 브라만 사상을 닮아 있다. 이 세상의 절대적인 지극한 기운을 사람이 받아 들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브라만을 사람이 받아 들여 아트만이 된다는 것과 같다. 지고지순한 창조의 기운을 받아 들였으니 깨달음을 얻은 자가 천주를 그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시천주 사상이다.
둘째, 우주의 창조의 기운을 그 몸에 품고서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의 신분의 고하를 뛰어넘게 된다. 그러므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차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동학교도가 되어 천주를 그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 신도는 이 세상의 계급을 벗어나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백성을 모두 동학교도로 만들어 평등한 세상 조선을 새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평등사상과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런데 동학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평등한 세상을 이루자고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왕정국가에서는 반역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인내천 사상이란 최제우의 기본적인 사상을 더욱 알기 쉽게 그의 제자들이 정립한 것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왕이라고 하더라도 민심을 천심으로 알고서 백성들 앞에서 겸손하게 정치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본주의이면서 동시에 민본주의 사상을 독재자인 대원군과 조선의 왕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조선왕실의 대응은 동학교를 탄압하고 그 교도들을 말살하는 것이다. 훗날 동학혁명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상적인 갈등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동학혁명을 통하여 조선의 왕실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이 바로 조선이라고 하는 민주주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한 사상이 훗날 왕정을 버리고 민주정과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하는 의병활동으로 전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최만희의 사랑방에서 서배 마을 출신인 이종흠 선비가 훈장 이덕화에 대하여 두 사람에게 계속 설명을 하고 있다; “이덕흠은 동학교도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조선왕정과 세도정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빈한한 자신의 양반가문을 한번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결심을 하고서 그는 열심히 한학을 공부한 다음 1863년에 고종이 들어서자 한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다음해에 낙향을 하고 말았지요”. 그 말을 들은 손성규가 끼어들어 그 낙향의 사유를 묻는다.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종흠 선비가 다음과 같이 설명을 계속한다; “벗들이 묻자 그는 두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나 대원군의 개혁정치나 백성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은 똑 같다는 것입니다. 한양에서 대원군이 궁궐을 새로 짓고 증축을 한다고 야단인데 그 부담이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가 되어 더욱 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조선의 종주국으로 행세를 하고 있는 청나라가 벌써 서양세력에게 굴복을 하고서 침탈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나라 황제만 쳐다보고 있는 조선은 그 앞길이 막막하다는 것입니다”.
다소 의아한 주장이지만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는 벌써 손성규를 통하여 이덕화 훈장이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기에 질문을 하지 아니하고 계속 이종흠 선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자 이 선비는 진지하게 설명을 계속한다; “한양을 다녀온 이덕흠의 그러한 주장을 듣고서 그의 벗들이 한편으로는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신반의를 하면서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지요. 모든 고향사람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덕흠은 모진 결심을 하고서 멀쩡한 자신의 양반 이름을 버리고 평민에게 어울리는 이름 이덕화로 바꾸고 말지요”.
그 말을 들은 최만희가 한숨을 쉬면서 한마디를 한다; “허, 자신의 양반 이름을 고쳐서 흔한 백성의 이름자로 만들어 스스로 부르다니… 부모님이 아시면 무어라고 하실까?”. 그러나 손성규는 그 심정을 알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지 동정적인 한마디를 보태고 있다; “자신의 견문과 사상을 알아주는 벗이 주위에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쓸쓸하였겠구만, 오죽이나 고립무원의 처지였으면 이름까지 바꾸어 버리고 말았을까…쯧쯧”.
이종흠의 말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그에게 더 불행한 일이 찾아옵니다. 조강지처가 딸 자식 하나만을 남긴 채 갑자기 별세를 하고 말지요. 망연자실해 있는 이덕흠에게 마침 내남 안심에서 서당 훈장을 해달라고 하는 요청이 온 겁니다. 그는 아무런 미련이 없이 고향 서배 마을을 떠나 그곳으로 아예 이주를 해버린 것이지요. 그후 10년 동안 서배 마을에서는 그를 만나본 고향사람이나 벗들이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차중에 오늘 이 자리에서 우연히 제가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제가 아는 설명을 드리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그 말을 들은 손성규와 최만희는 훈장 이덕화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연이라고 하는 말이 은근히 가슴에 남게 된다. 이덕화와 그들 두 사람은 장차 어떤 인연으로 서로 사귀게 되는 것일까? 고종이 민비의 도움으로 친정을 시작하여 이제는 나라의 문을 열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이고자 소위 개화정책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 시대에 경주 교리와 내남에서는 새로운 인연이 시작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배 할배10(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5 |
---|---|
서배 할배9(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5 |
서배 할배7(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3 |
서배 할배6(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3 |
서배 할배5(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