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9(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5. 02:15

서배 할배9(작성자; 손진길)

 

3. 너븐들의 초상과 49

 

18742월달에 내남 상신 곧 너븐들에서 큰 초상이 난다. 너븐들과 안심 그리고 박달 마을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월성 손씨들이 하나같이 너븐들의 대 지주인 손성규의 사촌형 손성신의 집으로 몰려들고 있다. 천석꾼 손성규의 마지막 윗대 어른인 큰 숙부 손익채가 너븐들 차남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81세에 향년을 맞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가들이 모여서 함께 그 초상을 치르고자 분주하다. 그 일에 앞장을 서고 있는 내남 월성 손씨의 가주인 손성규도 마음이 바쁘다. 따라서 한동안 경주 오일장에 나가지를 못하고 있다. 그때문에 손성규는 서당의 훈장인 이덕화와의 약속 곧 다음 번 경주 오일장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만다.

물론 매사 빈틈이 없는 신중한 성격의 손성규는 진작에 인편으로 훈장 이덕화에게 안부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큰 삼촌의 초상을 치르느라고 한동안 경주 오일장에 나가지를 못할 처지가 되었으니 양해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49제가 끝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주 오일장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그 초상으로 말미암아 너븐들은 물론 그 서쪽의 안심과 박달까지 떠들썩하다. 그러므로 구태여 그러한 전갈이 없더라도 안심의 서당 훈장인 이덕화가 그 사정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인편으로 먼저 소식을 전해주고 있으니 지주 손성규는 신의가 있으며 빈틈이 없는 인물이라고 이덕화 훈장은 새삼 느끼고 있다.

24일 너븐들의 초상집에 모여든 면면들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생집에서 아버님이 새벽에 별세를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달려온 사람은 덕천 구왕골에 살고 있는 장자 손성구이다. 그는 1815년생이므로 가주인 손성규보다 9살이나 많은 사촌형이다. 그리고 그동안 부친을 모시고 있던 바로 아래 동생 손성신보다 7살 연상이다. 둘째, 손성신의 친동생 손성곤은 형 집 바로 옆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새벽에 형집에서 부친이 별세하자 마자 곧장 달려와서 초상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

손성구와 손성신 그리고 손성곤 등 3형제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친척들에게 부고를 인편으로 보내고 있다. 너븐들에는 30여호가 함께 살고 있는데 거의가 월성 손씨 일가들이다. 소위 세거부락인 것이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부음이 돌게 된다. 그리고 이웃 마을 안심에도 일가들이 많이 살고 있으므로 빠짐없이 부고를 돌리고 있다.

또한 깊은 산 아래 박달에는 일가들 뿐만 아니라 지주 손성규의 논밭을 부치는 소작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에게도 부고를 전하고 그 북쪽에 있는 비지리의 주민들에게도 부고를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월성 손씨와 혼맥을 맺고 있는 집안들이 그곳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가주인 손성규는 차제에 외동아들인 상훈이를 불러 예를 갖추어 안심에 있는 훈장 이덕화와 경주 교리에 있는 만석꾼 최만희에게도 부고를 전하게 한다. 아들 손상훈이 이제 24세가 되었으니 아직 미혼이지만 장례진행에 바쁜 부친을 대신하여 그 정도 역할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상훈에게 교리의 최만희를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같은 상신 너븐들에는 가주인 손성규의 사촌과 오촌 조카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이 하나같이 문중의 초상을 치르기 위하여 발벗고 나서고 있다. 그들의 면면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조부 손사설의 장자인 손선익의 후손이다. 손선익의 뒤를 이은 양자 손성벽이 역시 아들이 없이 16년전에 벌써 작고하였으므로 손사설의 3남인 손익채는 자신의 손자인 손상걸을 손성벽의 양자로 보내어 종가의 대를 잇게 하고 있다. 따라서 손상걸이 종손으로서 작은 할아버지의 장례에 참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가의 조상을 따른 족보이다. 생가로 보면 그것이 아니다. 손상걸의 친 할아버지가 손익채이므로 그는 조부의 장례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손상걸의 양부가 손성벽인데 그가 가주인 손성규의 친형이다. 그러므로 종손인 손상걸은 생가로 보면 손성규의 오촌 조카인 당질이지만 양가로 보면 바로 3촌인 숙질간이 된다.

둘째가, 조부인 손사설의 막내 아들인 손동익의 자손들이다. 안심 구일 마을에 살고 있는 장남 손성임이 자신의 아들인 손석환을 데리고 초상준비를 돕고 있다. 상신에 살고 있는 차남 손성위는 역시 자신의 아들인 손석조를 데리고 장례일을 돕고 있다. 참고로, 가주인 손성규의 사촌인 손성임은 손성규와 동갑이고 그의 동생인 손성위는 2살 연하이다.

셋째로, 조부인 손사설의 4남인 손오익은 먼 일가 11촌 숙부인 손사도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으나 그 자신 아들을 얻지 못하고 요절을 하고 말았다. 그후 그 문중에서는 새로이 양자를 들여서 대를 이었다고는 하는데 내남 너븐들과의 연락은 끊어져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번 초상에도 참여하는 자가 없다.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전답을 거의 소유하고 있는 천석꾼이며 너븐들 월성 손씨의 가주인 손성규는 별세하신 큰 숙부 손익채의 아들인 사촌들과 장례절차를 한참 논의하고 있다. 종형인 손성구와 손성신 그리고 종제인 손성곤이 먼저 부친의 염을 하고 입관하는 일을 사촌인 손성임과 손성위에게 맡기자고 한다. 그렇게 결정을 했다.

그리고 조문을 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은 가주인 손성규와 상주인 3형제가 맡기로 했다. 따라서 그들의 내자들이 일가 부인들과 함께 음식을 만드느라고 손성신의 초상집이 분주하다. 내남 일대에 흩어져 사는 월성 손씨 일가들 뿐만 아니라 그 사돈들의 집안에서도 많은 조문객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다. 조문객이 3일 동안 계속 밀어닥치고 있는데 그 수가 대단하다. 

장지는 맏상주인 손성구의 의견에 따라 그의 집 가까이 있는 산으로 정했다. 손성구의 집이 덕천 구왕리에 있으므로 그 앞산 9능선 깊은 골에 묘를 쓰기로 했다. 그곳은 월성군 내남면과 울주군 두서면이 만나는 지점이다. 참고로, 조천 최부자의 조상들의 묘소와 크게 멀지가 않다. 그러나 내남 상신에서 보자면 상당히 먼 곳이다. 장자 집안에서 전적으로 묘를 관리하겠다고 말하므로 장지가 다소 멀기는 하지만 가주인 손성규와 나머지 상주들이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발인을 하루 앞둔 날에 안심의 서당 훈장인 이덕화 선비가 조문을 왔다. 그가 왔다고 하므로 상주들과의 인사가 끝난 다음에 가주 손성규가 직접 그를 맞이하여 사랑방에서 식사를 함께한다. 선비를 알아보고 대접하는 극진한 예법이다. 훈장 이덕화가 먼저 다시 한번 손성규에게 조의를 표한다; “다시 한번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81세에 향년을 맞이하셨으니 비록 슬프다고 하더라도 호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가주 손성규가 예의를 차린다; “, 슬픔 가운데에서도 그나마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신 중에도 걸음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훈장 이덕화가 다시 말문을 연다; “갑자기 한 분 남으신 숙부님마저 별세를 하셨으니 이제는 집안에 어른이 아니 계셔서 가주께서 더 한층 책임이 무거우시겠습니다”. 손성규가 다시 대답을 한다; “문중에서 모든 일을 나누어 잘하고 있으므로 크게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리고 훈장 선생님께서도 많이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훈장 이덕화가 크게 고개를 끄떡인다; “제가 힘 자라는 대로 가주의 일이라고 하면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겠습니다. 아무쪼록 늘 강건하시고 대범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훈장 이덕화의 말을 들으면서 가주 손성규는 적잖이 힘을 얻는 것 같다. 민초의 삶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도 밝은 선비 이덕화가 가까운 안심 마을에 살고 있으니 손성규 자신도 상당히 마음이 든든하고 안심이 된다. 한학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시대를 읽는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그만한 선구자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조선 왕조가 외세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있는 혼란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시골의 천석꾼이라고 하더라도 그 재산을 지키기가 앞으로는 결코 쉽지가 아니할 것이다. 그 점을 미리 내다 보고서 지주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의 고견을 많이 참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발인을 얼마 앞두고 있는 시점에 멀리 경주 교리에서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가 문상을 왔다. 영남지방에서 거의 유일한 만석꾼의 집안 가주가 왕림을 한 것이니 내남에서 사발 통문이 벌써 돌고 있다. 최만희의 부친 최세구가 살고 있는 이조에서부터 최씨 집안의 사람들이 가주인 최만희를 경호하면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덕천리에서 최씨 문중의 땅을 많이 부치고 있는 주민들도 그를 따라 상신의 초상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렇게 떠들썩한 행사를 보고서 동구 쪽에서 그를 기다리던 손성규가 한마디를 하고 있다; “과연,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의 위세가 대단하구먼. 하기야 그 집안 때문에 먹고 사는 세대가 내남에서만 500세대가 넘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날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 사람들은 두 번 바빴다. 한번은 오래간만에 내남을 방문한 경주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의 얼굴을 서로 가까이에서 보고자 야단들이었다. 40대 초반의 최만희는 소문난 부자에 어울리게 그 풍채가 좋고 인물도 좋다. 그 다음에는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모두들 오래 지켜보았다. 내남 상신 너븐들을 출발하여 꽃 상여가 한참 동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진행하고 있다. 만장기를 앞세운 그 행렬이 참으로 길다.

월성 손씨들이 내남면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따라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신라 6촌 가운데 경주 손씨의 득성조인 구례마가 경주 모량에 살고 있다가 그 후손들이 대거 내남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월성 손가들이 모두 길로 쏟아져 나와서 상여가 지나는 길목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장례행렬을 인도하는 호상꾼들이 구슬프면서도 구성진 가락을 울리면서 종소리와 함께 앞서 발인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어느덧 그 행렬은 내남의 동남쪽 산밑에 있는 구왕골에 도착하고 그 다음에는 아홉 능선을 타기 시작한다.

한번 가면 언제 오나. 어허이 어허이. 그 옛날 뛰놀던 개천을 지나 아홉 능선으로 올라가니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이 어허이. 먼저 가신  조상님네 귀한 자손이 이제서야 찾아 오고 있으니 반갑게 맞아 주소. 훠어이 훠어이. 남은 자손일랑 하나같이 굽어 살펴 주옵소서. 땡그랑 땡그랑….”.

긴 여운을 남기면서 상여는 그렇게 산을 넘어가고 있다. 장지가 멀어서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상주와 일꾼들 그리고 조문객들도 상당히 힘이 든다. 따라서 호상꾼들이 더 큰 목소리로 구성진 가락을 계속 뽑으면서 상여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특이하게 4일장을 치르고 있다. 멀리서 오는 조문객을 생각하여 3일장이 아니라 4일장을 선택한 것이다. 높은 산고개를 넘어 운구를 하고 그날 매장까지 하느라고 모두들 하루가 고단하다. 그렇게 187427일은 긴 하루가 되어 역사속으로 그 꼬리를 감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