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7(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3. 12:10

서배 할배7(작성자; 손진길)

 

경주 오일장에서 우연히 내남 안심의 훈장선생 이덕화 선비를 만난 지주 손성규는 그와 헤어지자 마자 급히 발걸음을 경주 교리로 향하고 있다. 경주 남천내 북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교동 마을에는 향교 옆에 교리 최부자의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손성규는 그곳에서 만석꾼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를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다.

최만희는 내남 이조에 살고 있는 최세구의 아들이다. 최세구는 최세린의 친동생인데 그들의 부친이 최기영이고 조부가 그 유명한 최언경이다. 최언경은 워낙 총명하여 조천 최부자의 가주인 9촌 숙부 최종률의 양자가 되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경주 교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재산을 두배로 늘려서 만석꾼이 된 인물이다. 그후 그의 장자인 최기영과 장손인 최세린이 차례로 교리 최부자의 가주가 된 것이다.

최세린은 그의 친동생인 내남 이조의 최세구에게 그곳의 5천석지기 논을 맡아서 관리하도록 위임을 하고 있다. 그들은 마름을 두지 아니하는 대신에 가주를 제외하고 모두가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소작농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소작인들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고 생계가 어려운 주민들에게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역할을 내남에서는 가주의 친동생인 최세구가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언경의 장손으로서 만석꾼의 살림을 살고 있는 최세린이 아들이 없자 친동생 최세구의 똑똑한 아들 최만희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므로 최만희는 이조의 아버지 집을 떠나 일찍 백부의 아들이 되어 경주 교리로 옮겨 가서 살았다. 그는 양부인 최세린이 1846년에 일찍 별세를 하고 나자 15세의 나이에 만석꾼의 살림을 물려받게 되었다.

최만희가 머리가 좋다고는 하지만 어린 나이인지라 수년간 생부인 최세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25세때부터는 그것이 아니다. 교리 최부자의 가훈을 착실하게 지키며 재산을 관리하는데 아주 능숙하다. 더구나 그의 나이 42세가 된 1874인 지금은 그의 놀라운 경영수완이 온 경주바닥에 소문이 자자하다.

최만희의 풍모와 위세가 워낙 당당하여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그러나 교리 최부자 마을로 들어선 내남 너븐들의 천석꾼 손성규는 거침이 없다. 마치 자기 집처럼 편하게 최부자 가주의 집마당을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머슴의 연락을 받은 최만희가 급히 마중을 나오면서 인사부터 건네고 있다; “아이고, 아저씨, 정말 반갑습니다. 오래간만에 조카집에 오셨군요”.

최만희의 반가운 인사를 듣자 손성규가 허허라고 웃으며 급히 말문을 연다; “, 이 사람 아우, 그 아저씨 소리 그만두라고 했더니 아직도 나를 놀리고 있구만. 자네 증조부와 나의 조부가 절친이라고 하여 나이가 8살 차이밖에 나지 아니하고 있는 자네와 내가 숙질간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부디 그러지 말게. 형 아우로 알고 남은 세월 잘 지내자고 내가 누누이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최만희가 능청스럽게 응수를 한다; “오뉴월 땡볕은 하루가 무섭다고 하는데 8년이나 연상이시니 숙질간이 맞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저씨”. 그 싱거운 소리에 손성규가 손사래를 치면서 대꾸를 한다; “자네 좋은 대로 하게. 나보고 빨리 죽으라고 하는 소리 같으니 그 순서대로 한 십년 먼저 내가 죽으면 되겠구만허허”.

손성규는 어린 시절 부친 손성익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조부 손사설과 교리 최부자의 가주가 된 최언경과의 각별한 친분에 대하여 듣고 자랐다. 자연히 손성규는 이웃마을 이조에 살면서 교리 최부자의 재산을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최세구 곧 가주 최세린의 친동생의 집을 부친의 손에 이끌려서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 전신이 조천 최부자인 경주 교리의 최씨 일가는 참으로 신의가 대단한 가문이다. 최언경이 후손들에게 자신의 절친인 내남 상신의 손사설이 너븐들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개천가를 논과 밭으로 개간하는데 있어서 재정적인 도움이 계속 필요할 것이니 그가 요청하는 대로 융통하여 주도록 하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그것을 증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교리 최씨 문중의 가주인 최만희가 손성규를 자신의 사랑방으로 인도한다. 술상을 보아 오도록 지시한 다음에 어떤 용건인지 묻고 있다. 왜냐하면, 매우 가까운 사이이기는 하지만 좀처럼 찾아오지를 않는 내남 상신의 천석꾼 손성규가 일부러 밝은 대낮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니 분명 급한 용무가 있는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나이 50이 된 손성규는 별로 길지 아니한 자신의 수염을 만지면서 신중하게 입을 연다; “금년 초에 경작지 개간이 완성이 되었으니 돈을 융통하기 위하여 온 것은 아니네. 그보다는 다른 용무인데최만희 자네 혹시 괘릉 서배 마을에 아는 사람이 좀 있는가?”.

최만희가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사랑방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있다. 최만희의 안사람인 진성 이씨 부인이 손성규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면서 일하는 사람과 함께 술상을 들여온다. 그 상에는 언제나처럼 교리 최 부자 집에서 직접 담근 정종과 청어를 말려서 만든 과배기로 요리한 맛깔난 안주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씨 부인도 집안끼리 100년 이상 알고 지내고 있는 내남의 월성 손씨의 가주인 손성규가 무척 반가운 것이다.

최만희는 부인이 문을 닫고 돌아가고 나자 말문을 열고 있다; “형님께서 하문하신 말씀이 외동 괘릉 근처에 있는 서배 마을에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인데 어째서 그러십니까? 무슨 사업관계로 필요하신 일입니까?”. 손성규가 급히 손을 내어 저으면서 말한다; “아닐세 동생, 그것이 아니고 실인즉 오늘 경주 오일장에 갔다가 내남 안심의 서당에서 훈장을 지내고 있는 이덕화 선비를 만났는데 그가 참으로 식견과 경륜이 빼어나더구만. 나는 처음으로 그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그 훈장은 서배 마을 출신이 아닌가? 그래서 혹시 개인적으로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내력이 궁금하여 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네. 다른 뜻은 없네. 일종의 단순한 지적인 호기심이야…”.

30년 이상 내남 상신의 손성규를 알고 지내고 있는 손 아래의 최만희로서는 그러한 경우가 처음이다. 손성규가 무엇을 보고서 일개 서당 훈장인 이덕화라는 사람에 대하여 그토록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평소 굉장히 신중한 손성규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따라서 조금 토를 달아 본다; “ 형님, 저희 사랑채에 식객들이 많이 머무르고 있는데 괘릉 사람도 있습니다. 이종흠이라고 하는 선비인데 그에게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만나게 해드리는 것은 전혀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궁금하군요. 도대체 서당 훈장인 그 사람이 어떤 점이 그렇게 출중하던가요?”.

최만희 역시 사마소에서 대과를 치르고 진사 벼슬을 하고 있는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니까 백부가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적인 호기심이 생겨서 손성규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손성규는 그 점을 알고서 당장 간단하게 그의 호기심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고자 한다.

손성규의 설명이 핵심만 짚고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끝장이 나고 조선도 이제는 긴 잠에서 깨어나 서구의 문물을 받아 들이는 개화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선비가 주장을 했네. 왜냐하면, 청나라 황실도 벌써 20년전에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동쪽 해안가의 땅을 떼어주고 아편의 수입까지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는구먼. 그렇게 서양의 나라들이 청나라를 굴복시킬 정도로 힘이 세다면 조선도 장차 큰 일이 아닌가? 자네의 만석꾼의 재산이나 졸부인 나의 천석꾼 재산도 이제는 조선의 왕실이 지켜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러한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좀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그의 고향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는 것이네. 평소 이 선비가 헛된 주장이나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진실로 세상을 보는 눈이 탁월한 것인지 알고 싶어서 그러한 것이네”.  

최만희는 손성규가 궁금해하고 있는 이야기를 자신도 듣고 그 실상을 파악하고 싶어한다. 부자의 귀는 역시 밝아야 한다. 어디에서부터 큰 쥐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애써서 지키고 있는 큰 재산을 파먹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직관력이 뛰어난 천석꾼 손성규가 그토록 알고자 하는 그것이 자신의 과업과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랑채 손님 곧 자신의 식객 가운데 괘릉 사람 이종흠을 빨리 불러 오라고 하인에게 급히 지시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