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4(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3. 03:45

서배 할배4(작성자; 손진길)

 

2. 천석꾼 집안의 외아들;

 

손상훈의 부친인 손성규는 날만 새면 거랑가로 나가서 돌밭을 전답으로 만드는 개간일에 매어 달리고 있다. 그런데 1851년에 태어난 손상훈은 어린 왕 고종이 조선의 새 임금으로 등극한 1863년에 조선의 나이로 13살이 되었다. 남자나이 13살이면 시골에서는 꼬마 머슴으로 부릴 수 있는 연령이다.

그래서 그런지 부친 손성규는 외아들 상훈에게 명령을 내렸다; “서당을 파하는 대로 책보를 집에다 두고 얼른 거랑가로 나와서 애비의 일을 거들도록 하라. 이제 너도 꼬마일꾼의 몫을 해야만 한다”. 그때부터 손상훈은 매일 방과 후에는 거랑가에서 논을 개간하고 있는 부친을 도와야만 했다.

그렇게 10년 남짓 아버지의 일을 도왔을 때에 손상훈에게 큰 변화가 찾아 왔다. 갑자기 천석꾼집의 외아들로 그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그 연유인즉, 증조부인 손사설로부터 시작하여 조부인 손성익을 거쳐 부친의 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100년 가까이 끈질기게 진척이 된 그 개간사업이 1874년 곧 손상훈이 23세가 되는 해에 일단락이 되었기 때문이다.

손상훈의 집이 있는 내남의 너븐들 곧 상신은 물론이고 그 안쪽의 안심 그리고 서쪽에 솟아 있는 단석산 아래의 박달에 이르기까지 큰 개천가에 엄청난 경작지가 마련이 된 것이다. 무려 1000마지기에 이르는 넓은 농토이다.

한 집에서 10마지기 2000평의 논농사를 지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손성규가 소유하게 된 1000마지기의 농토를 경작하자면 소작농가가 100세대나 필요하다. 굳이 곡수로 그 소출을 계산해보자면, 좋은 논 1마지기에서 2섬의 곡식이 생산이 되므로 그 절반인 1섬씩이 지주의 몫이다. 따라서 대지주인 손성규는 천석꾼이 된 것이다.

시골 양반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친 손사설, 손성익, 손성규 3대의 개간사업이 그 결실을 맺어 이제 손성규 자신은 나이 50에 천석꾼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당면한 문제는 23세나 되는 노총각인 외아들 손상훈의 혼사문제이다. 그래서 조용히 아들을 불러 의견을 물어보고 있다; “가문의 숙원사업이 이제 끝났다. 그동안 미루어온 너의 혼사문제를 이제 추진할 생각이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아들이 의외의 답변을 하고 있다; “아버지, 저의 혼사는 급하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밤낮 일만 하셨으니 아버지께서 일년쯤 휴식을 취하신 후에 저의 결혼문제를 생각하셔도 됩니다”.

손성규는 그 대답 가운데 평소 태평스러운 아들의 성격의 일단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입맛이 쓰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너의 나이 벌써 23세이다. 너의 동무들은 열 대여섯살에 결혼하여 벌써 자식이 여럿이다. 내가 그동안 조상님들의 개간사업을 마무리하느라고 바빠서 너의 결혼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니 그리 알고 이제부터는 혼인문제를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라. 너는 독자이므로 한시바삐 대를 이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부친의 말씀은 당부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것이다. 천석꾼의 소원을 이루게 된 부친은 이제 외아들인 자신을 보고서 자손의 번성이 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손상훈은 그 말씀에 순종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신부감으로 점 찍고 있는 처녀에게 아직 결혼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부친에게 듣기 좋게 답변을 한다; “잘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한번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결심이 서게 되면 먼저 아버지께 말씀을 드릴 터이니 그때 저의 의견을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손성규는 외아들의 말을 듣고서 의아한 생각이 들고 있다. 남자 나이 23세이면 구한말 고종시대에 있어서는 참으로 노총각이다. 빨리 장가를 가게 해달라고 당사자가 부모에게 졸라도 시원치 아니한 나이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깊이 생각을 해보겠다고 하면서 손상훈이 뜸을 들이고 있다. 평소 그 성격이 태평스러워 보이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꽤 강단이 있는 아들이다. 어째서 그렇게 신중하게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손성규는 아들의 의중을 한번 푹 찔러보고자 한다; “어디 참한 처자라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23살이나 되도록 어째서 한번도 자신의 결혼이야기를 꺼내어 본 적이 없느냐? 그 나이 되도록 눈에 드는 처녀가 없다고 하는 것도 사내로서는 흠이다.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보아라. 이 애비가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느냐?”. 갑자기 손상훈의 뺨이 붉어지고 있다. 그는 내심이 들킨 것만 같아서 부친의 얼굴을 피하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을 한다; “그저 생각할 시간을 줍시사 하는 것입니다. 딱히 마음에 둔 처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에 드는 처자에게 장가를 가고 싶습니다. 평생 한번 결혼하는 것이니 시간을 두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꽤 알찬 아들의 말을 듣고서 손성규는 내심 빙긋 웃으며 한걸음 물러서고 있다; “알겠다. 수일 내로 결심을 말해주면 좋겠다. 네 어미에게도 그렇게 내가 말해 두마”.

손상훈은 증조 할아버지 손사설이 설립한 동네의 서당을 오래 다녔다. 그 서당의 훈장으로 초빙이 된 스승이 외동 서배 마을 출신인 이덕화 선비이다. 내남 사람들이 이덕화로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사실 이덕흠이다. 그러나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훈장이 내남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덕화라고 소개를 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알고서 지내고 있다.  

손상훈의 부친의 연세에 비하면 훈장은 젊은 편이다. 그런데 외동면과 내남면이 서로 인접하여 있기는 하지만 걸어가자면 그 거리가 상당하다. 그러므로 훈장 이덕화는 고향인 서배 마을을 떠나서 아예 수년간 내남 양삼 마을에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여쁜 딸이 하나 있다.

손상훈은 서당을 다니면서 언제부터인가 훈장어른의 딸을 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그가 위로 누님은 두 분 계시지만 아래로 누이동생은 없는 독자이므로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그 처녀에게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이동생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여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손상훈의 나이가 23세가 되자 그녀도 당찬 18세가 되었다. 처녀가 그 정도의 나이가 되면 혼처가 들어오고 보통 시집을 가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전혀 그러한 움직임이 없다. 그리고 훈장선생인 이덕화도 딸의 혼사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 낌새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손상훈은 그녀가 아직 처녀로 남아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행운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래도 언제 훌쩍 떠나가버릴지 몰라서 내심 조바심이 나고 있는 중이다.  

되돌아보면, 손상훈은 6년전 그가 17세가 되었을 때 벌써 서당을 졸업했다. 그 이후에는 안심과 박달에 있는 거랑가로 개간일을 하러 다니면서 일부러 양삼 마을의 서당을 기웃거렸다. 겉으로는 훈장선생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꾸몄다. 하지만 내심은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는 것이 낙이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정을 주고 있는 속 깊은 사내가 손상훈이다.

18세나 된 그녀가 어째서 아직 혼사이야기가 없는 것일까? 어째서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시집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 23세나 된 노총각 손상훈은 여전히 그 점이 못내 이상했다. 그러나 막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인 엄한 유교사회에서 그것도 시골의 양반의 자제가 어떻게 남의 처녀의 신상에 대하여 어른에게 여쭈어 볼 수가 있다는 것인가?

당시 19세기 고종의 시대에 있어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속으로 남모르는 신경만이 잔뜩 쓰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번 그녀의 내심과 스승님의 의사를 타진해보아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다가는 그녀를 놓쳐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갑자기 손상훈의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떠볼 수가 있을까? 손상훈 자신에 대하여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은 그녀를 참으로 참한 색시감이라고 수년 전부터 내심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밝힌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점이 애타게 궁금한 것이다. 따라서 손상훈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적극 모색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 쉽지가 않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에서 마음대로 남의 집 처녀를 불러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중간에 내세워서 말을 건너기에도 마땅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손상훈은 그녀와 그 부친인 훈장선생님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호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