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3. 03:43

서배 할배1(작성자; 손진길)

 

1.      형산강 줄기 이조의 천변에서 자라나는 그들;

 

한국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쉽게 형산강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이유는 작은 강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유식한 체하는 인사들이 형산강은 낙동강의 지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낙동강은 북에서 흘러 남해로 들어가는데 비해서 형산강은 반대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남에서 북으로 흘러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형산강의 발원지는 울주군의 북쪽산지와 월성군의 남쪽산지이다. 울산을 둘러싸고 있는 울주군의 북쪽산지와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월성군의  남쪽산지가 서로 중첩이 되어 있으므로 딱히 형산강의 발원지가 어느 군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아니하다. 특히 오늘날은 시를 광역화하기 위하여 울주군이 울산광역시에 편입이 되어 있고 월성군이 경주시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울산광역시와 경주시의 경계에서부터 형산강이 시작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하지만 옛날 경주 월성군의 남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내남면의 사람들에게 물으면 너나없이 형산강이 내남의 앞산에서 시작이 되고 있는 그들의 강이며 그들의 농사의 젖줄인 어머니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들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강이 형산강이며 상류가 내남 이조의 넓은 개천인 것이다.

형산강은 내남 이조를 지나면서 수량이 많아지고 넓은 유역을 지니게 된다. 이유는 서쪽의 산지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세개의 개천의 물이 이조에서 모두 형산강으로 유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개의 개천이 모여 드는 곳이라는 의미로 이조의 넓은 천변을 개모듬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곳이 사실은 비옥한 지역이다. 하지만 자갈이 많아 비옥한 토양을 숨기고 있는 곳이다.

땅의 비옥함을 알고서 대대적으로 개간을 하고자 나선 사람이 역사적으로 경주 최부자의 부를 이룬 선구자 최국선과 그의 아버지 최동량이다. 그들이 개간한 지역을 내남 사람들은 예부터 이조천 땅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은 내남의 서쪽산지에서 이조 방향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개천을 이조천이라고 지도상에서 편리하게 표기하고 있지만 예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를 않는다. 그저 그것은 거랑이며 남과 북에는 여러 작은 거랑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여러 거랑과 실개천이 별도의 이름도 없이 주변 마을의 농토를 적시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마운 물줄기이며 생명수와 같은 농업용수를 자신들의 논과 밭에 공급하고 있는 귀한 개천들이다.

형산강은 내남면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 경주 시내 서편을 관통하여  도도하게 포항으로 진군한다. 포항에서 영일만을 통하여 동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해안 남쪽의 토끼 꼬리가 그들이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이 된다. 참으로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는 특이한 강이다.

가을이 되면 특이한 강줄기를 타고서 영일만에서부터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황어 떼를 만날 수가 있다. 연어과에 속하는 황어의 맛이 짧은 한철 경주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경주의 서천내를 지나면서 그렇게 황어가 경주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연어고기와 비슷한 바닷고기의 싱싱한 맛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엽에 형산강 상류와 만나고 있는 이조천 하류의 넓은 유역에 있는 돌밭을 대규모로 일구어 문전옥답으로 개간한 특이한 집안이 있다. 위에서 언뜻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남 이조의 부자인 최씨 집안이다. 17세기 후반부터 최진립 장군의 손자인 최국선이 부친 최동량을 도와서 이조천 개모듬의 땅을 전부 개간하여 일약 5천석지기의 부자가 것이다.

최국선은 이조천변의 땅을 개간하면서 장차 소작을 동네 사람들에게 세가지 약속을 단단히 했다; 첫째, 당시 소작인과 지주와의 소득분배가 통상 3 7인데 그것을 5 5 하겠다고 공약한 것이다. 둘째, 볍씨를 논에 바로 뿌리지 아니하고 못자리를 만들어 모를 키운 다음에 모를 논에 옮겨 심는다는 것이다. 마디로, 모내기 이앙법을 영남지방에서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셋째, 퇴비를 사용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놀라운 세가지 약속이 주민들의 호응을 크게 얻었다. 따라서 최부자의 논을 얻어 부치고자 하는 내남 사람들이 개모듬이라는 이조의 천변으로 출근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천변의 돌을 골라내고 논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수년이 걸리는 개간사업을 수행하느라고 최부자의 곳간은 비게 생겼다. 그러나 최국선은 끝까지 밀어 부쳤다. 결과 영남 땅에서는 보기가 쉽지 아니한 5천석지기의 부호가 내남 이조에서 탄생한 것이다.

형산강은 남에서 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서쪽산지에서 흘러내리는 개천물이 동으로 흘러 형산강에 계속 유입이 되고 있다. 유입의 중심지가 내남 이조이다. 그러므로 내남 사람들은 알기 쉽게 이조천이 내남면의 남쪽인 월산리와 부지리 그리고 용장을 거쳐 북쪽의 둥굴 마을로 흘러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동네에 비옥한 최부자의 논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천변에 살고 있는 내남 사람들은 후덕한 최국선을 이조천의 부자 일명 조천 최부자라고 부르면서 최부자의 논을 소작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왜냐하면, 조천의 최부자는 대를 이어 내남 이조에 살면서 그들의 세가지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때문에 엄청난 소출의 증대로 조천의 최부자 일가는 인심을 얻으면서도 자꾸만 부자가 되었다.

한편, 이조의 천변에서 이루어진 최씨 일족의 경제적인 성공은 내남면의 토착 양반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씨조선 초기부터 이조의 서쪽 지역에 살고 있는 월성 손씨들에게 있어서는 충격이 남달랐다. 그들의 중시조는 고려말 포은 정몽주의 친구였던 소회 손의경이다.

손의경은 공민왕과 공양왕 때에 태상소경을 거쳐 장관급에 해당하는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으나 이성계의 반역사건을 만나자 1390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인물이다. 그는 조상들의 고향인 경주 월성군 모량의 인근 취향산 자락에서 여생을 지내면서 자손들에게 4대가 지나기까지는 절대로 이씨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바가 있다.

그의 유언을 후손들이 지켰다. 따라서 4대가 지나자 똑똑한 고손자인 손가권이 세종 때에 출사를 하여 1420년에 문경현감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독자적으로 일가를 이루고자 생각하여 고향인 모량에서 남하를 하여 내남 덕천리에 자리를 잡는다. 그의 아들인 손강도 단성현감을 지낸 후에 부친의 집이 있는 내남으로 돌아온다. 그러자 손자인 손억도 성균관 생원으로 한양에서 출세를 꿈꾸다가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서쪽인 상신리에 자리를 잡게 것이다.

그런데 손억의 후손인 손사설이 이조의 부자인 최씨 집안의 양자가 최언경과 형산강 상류인 이조의 천변에서 서로 동무가 되어 지방유지로서의 길을 단단하게 함께 닦게 된다. 이조의 천변에서 자라나고 있는 손사설과 최언경과의 우정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일까? 서배 할배의 이야기를 하자면 거기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순서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