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2(작성자; 손진길)
내남 상신에 살고 있는 손사설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크게 넉넉한 편이 아니다. 왜냐하면, 손사설에 이르기까지 위로 7대의 조상들이 변변한 벼슬자리로 나아가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범한 시골의 양반가문이 되고 만 것이다.
그곳에 자리를 잡은 선조가 성균관 생원출신인 손억인데 그의 작은 손자가 그 유명한 손번이다. 손번은 조부의 뒤를 이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중종 때에는 그 벼슬이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오늘날로 따지면 서울대학교 총장격이다.
손번의 차남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그 집안이 내남 상신에서 토박이 양반집안이 되고 만다. 그들은 7대가 지나도록 한양으로 진출하지를 못하게 된다. 즉, 대과를 보고 벼슬자리로 나아가는 똑똑한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줄곧 내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평범한 시골 양반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손사설의 선조들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손번의 고손자가 되는 손중권의 집안이 그러하다. 그리고 손중권의 고손자가 손사설인 것이다. 월성 손씨의 중시조인 고려말 소회공 손의경으로부터 따지면 손번이 9세손이고 손중권이 13세손이며 손사설이 17세손이 된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나타난 영민한 자손이 손사설이다. 그러므로 가문에서는 그의 장래를 생각하여 이조에 있는 조천 최부자의 서당에서 최부자의 자손들과 함께 한학을 공부하도록 신경을 써주었다.
당시 조천 최부자의 가장은 최국선의 증손자인 최종률이다. 그는 아들이 없으므로 집안의 여러 조카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면서 유심히 그들의 자질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그 가운데 9촌 조카인 최언경의 자질이 가장 뛰어났다. 따라서 가장이자 훈장인 최종률은 은근히 최언경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집안의 조카는 아니지만 또 한 명의 생도가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 그가 바로 손사설이다. 손사설은 1744년생인데 최언경이 그보다 한 살 위이므로 언제나 형이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그를 대접하고 있다. 최언경도 자신만큼 똑똑하며 사리가 분명한 손사설을 좋아했다. 따라서 한 살 아래이지만 손사설을 동무로 삼고서 친하게 지내고 있다.
학문이 깊어지면서 두 사람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1776년에 그들이 30대가 되었을 때 정조가 젊은 나이로 조선의 새 임금이 되었다. 이제는 젊은 시대가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한양으로 진출할 것인가? 아니면 고향의 발전에 기여할 것인가? 두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그 점을 깊이 생각했다.
그러한 때에 갑자기 최언경의 신변에 변화가 발생한다. 조천 최부자 가문의 가장이면서 스스로 서당 선생을 맡았던 진사 최종률이 9촌 조카인 최언경을 그의 양자로 삼은 것이다. 그때부터 최언경은 내남 이조의 최부자의 기업을 책임지고 경영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진출하고 싶은 야망이 졸지에 사라지고 있다. 왜냐하면, 조천 최부자의 가문을 이끄는 책임자들은 일체 한양의 벼슬자리에 나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엄격한 집안의 규율이 그에게 적용이 된 것이다. 사색당파의 정쟁으로 멀쩡한 사대부 집안이 허다하게 박살이 나고 있는 시절이므로 그 난을 슬기롭게 피하고자 하는 조천 최부자 집안의 비책이 엉뚱하게 영민한 최언경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손사설이 그것을 보고서 자신도 한양으로 가고자 하는 꿈을 접었다. 그 대신에 그는 어떻게 하면 내남 상신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는가를 궁리하게 된다. 그 즈음 최언경도 내남에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크게 고민하고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의 숙제를 함께 풀고자 다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두사람이 찾아낸 방법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첫째, 손사설은 조천 최부자가 5천석지기의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그 비결을 배우고 자신도 실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자신의 집안이 살고 있는 상신과 안심지역에서 거랑가의 돌밭을 개간하여 천석지기가 되고자 결심을 한 것인데 그 의견에 힘을 보탠 자가 그의 벗인 최언경인 것이다. 둘째, 최언경은 5천석지기 조천 최부자에 머물지 아니하고 경주시내로 진출하여 만석꾼이 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30대인 두 사람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계속 연구를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세우게 된다; 첫째, 최언경은 경주의 향교가 있는 남천내 교동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먼저 그곳에 10여채의 기와집을 짓고자 한다. 둘째, 월성군 내남 형산강 주변에 밀집이 되어 있는 전답과는 별도로 형산강이 경주를 지나 포항 쪽으로 흘러가는 그 중간지점에 다시 그만한 전답을 마련하고자 한다. 셋째, 손사설이 내남 상신과 안심에 있는 거랑가의 땅을 개간하는데 드는 비용을 최언경이 융통해주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최언경이 경주 남천내의 북쪽 언덕에 있는 교리에 10여채의 기와집을 짓고자 시도를 할 때에 경주의 향교와 유림에서 반대를 한다. 그 이유는 내남 시골의 졸부가 고도 경주의 유림을 우습게 보고 감히 향교의 권위에 도전을 하는 것으로 경주 토박이 양반들이 오해를 하였기 때문이다.
조천 최부자를 이끌고 있는 최언경의 기지가 그때 발휘가 된다. 그는 유림들에게 그런 염려를 하지 마시라고 겸손하게 설득을 했다. 특히 자신들의 가훈이 소작농들과 더불어 살며 굶주리는 주민들이 없게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경주는 사방이 80리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다고 첨언했다.
동으로는 북에서부터 포항과 감포와 울산이 모두 80리이다 내륙으로는 영천이 또한 80리이다. 그렇게 사방 80리에 굶주리는 백성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만석꾼의 꿈을 꾸고 있는 조천 최부자의 소망이라고 그들을 설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방 팔십리의 중심인 경주 교리에 자리를 잡고 이제부터 그 일을 하고자 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기와집은 향교보다 그 지붕의 높이를 한자이상 낮게 하겠다고 천명했다. 최언경의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주장은 경주 유림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지혜가 뛰어난 자가 내남 이조천의 최부자를 일약 경주 교리의 최부자로 만든 최언경이다. 그는 경주에서 포항으로 굽이치는 형산강을 따라 천북 방면에 새로운 땅을 마련했다. 개간을 통하여 농사를 지을 땅을 넓히고 마침내 경주 교리의 최부자가 경북에서는 유일한 만석꾼 집안이 된다.
경상도에서는 그 유례를 찾기가 힘이 드는 만석꾼의 집안이 그렇게 경주에서 탄생을 한다. 비옥한 호남평야에서는 만석꾼이 꽤 있지만 척박한 영남지역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교리 최부자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경상도에서는 희귀한 전설로 남아 있다.
이제는 내남 상신과 안심의 거랑가를 개간하여 천석꾼이 되고자 하는 손사설의 경우를 살펴볼 차례이다. 그는 당대에 그 일을 마무리하지를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차남인 손성익이 그 일에 동참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손성규가 그 일을 마무리하게 된다. 실로 3대에 걸친 끈질긴 노력으로 너븐들은 물론 안심까지 이르는 돌짝밭을 개간하여 옥토를 일군 천석꾼이 내남 상신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들 3대는 특히 박달에서 이조로 흐르고 있는 큰 거랑과 작은 거랑의 물들을 농토로 계속 끌어들이기 위하여 많은 보를 설치했다. 그 수리시설이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군 논에서는 물걱정을 모르고 농사를 지을 수가 있다. 그만큼 손성규가 마무리한 그 천석꾼의 살림은 참으로 단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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