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3(작성자; 손진길)
손사설은 조천 최부자의 수장이 된 최언경과의 만남에서부터 얻게 된 교훈과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후손들에게 집안의 가훈으로 전하게 된다. 그 내용이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은 5가지이다;
첫째, 소작료는 조천 최부자의 경우와 같다. 5대5의 소득분배를 지킨 것이다. 특히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 지역에는 월성 손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므로 일가인 그들에게 소작을 먼저 주고 소작료를 적게 받고자 하는 손사설의 방침은 자연부락 친족사회에서는 실로 당연한 것이다.
둘째, 모내기 이앙법을 실시하고 퇴비증산을 독려한 것이다. 그것 역시 조천 최부자의 경우와 같다. 셋째, 흉년이 들면 지주의 곳간을 먼저 열어 구휼을 하고 춘궁기에 부락에서 굶주리는 자가 없게 양식을 퍼준 것이다. 조천 최부자의 경우와 동일한 일이 내남 상신과 안심 등지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넷째, 동네에 서당을 설치하여 운영한 것이다. 배워야 가문도 돌보고 지역사회에 공헌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는 손사설의 철학이 강하게 반영이 된 결과이다. 서당의 위치는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중간지점으로 선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 지역에서 도보로 서당에 오는 자녀들의 편의를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심의 양삼 마을이 적격이다.
그리고 지주가 된 손사설의 집안에서는 어린 자녀들을 체계적으로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선비를 서당의 훈장으로 널리 구했다. 따라서 내남 동편에 이웃하고 있는 외동의 양반 집성촌에서 주로 훈장을 모셔오게 된다. 그 가운데 훗날 손성규의 사돈이 되는 인주 이씨 이덕화가 들어 있다. 그가 손성규의 외아들인 손상훈 곧 서배 할배의 장인이다. 왜냐하면, 외동의 서배 마을에서 초빙이 되어온 실력 있는 훈장선생이 바로 이덕화이며 그의 딸이 훗날 서배 할배의 배필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조강지처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재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규율이다. 그 말은 그들의 양반부락에서는 이혼을 하게 되면 동네를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혼이 흔한 현대사회에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는 규약이다. 어째서 그러한 규율이 반촌에서 적용이 되고 있는 것일까? 손사설의 경우와 조천 최부자의 경우를 모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조천 최부자의 가계도를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문파의 시조인 정무공 최진립의 6세손인 최종률이 아들이 없자 조카인 최언경을 양자로 삼아 종가의 재산을 물려준다. 그리고 최언경의 손자인 최세린 역시 아들이 없자 최만희를 양자로 삼아 종가의 재산을 경영하도록 물려준 것이다. 그들은 다른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얻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한 전통이 같은 내남의 양반촌인 월성 손씨의 부락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손사설의 결혼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새삼 발견할 수가 있다; 손사설의 첫번째 부인은 경주 김씨인데 남편보다 4살이 적은 1748년생이다. 그녀는 1770년에 아들 손선익을 낳고 살다가 1774년에 그만 안타까운 26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만다.
조강지처가 죽고 4살 짜리 아들을 홀로 키우게 된 30세의 손사설은 기가 막혔다. 따라서 후처를 얻게 되는데 그녀가 고경 오씨이다. 1758년생인 그녀는 전처의 아들 손선익을 잘 키우면서 남편 손사설에게 두 아들을 낳아 준다. 1785년생인 손성익과 1794년생인 손익채이다. 그런데 그녀는 불행하게도 아들 손익채를 힘들게 출산한 직후 과다출혈로 36세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젖먹이를 남기고 떠난 오씨 부인을 원망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당장 핏덩어리에 불과한 아들을 살려야만 하는 손사설의 입장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인근에서 당장 유모를 구하고 동시에 세 아들을 돌보고 키울 수 있는 후처를 구해야만 했다. 그렇게 맞이한 손사설의 세번째 아내가 오천 정씨인데 당시 그녀는 20세의 젊은 과부였다.
1774년생인 그녀는 19세에 남편을 사별하고 20세에 유복자인 아기를 낳았으나 그 아기마저 살리지를 못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영아사망율이 높은 이조시대 정조의 때이므로 그것은 그녀가 감수해야만 하는 참담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녀의 조건이 손사설에게는 적격이다. 따라서 그녀는 1794년부터 50살이나 된 손사설과 살게 되었는데 1806년에 남편을 여윌 때까지 두 아들을 낳았다. 1796년에 손오익을 낳고 1802년에 손동익을 낳은 것이다.
결국 손사설은 62년이라는 별로 길지 아니한 생애를 사는 동안 두 번 상처를 하고 세 번 결혼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흔치 아니하게 아들 5명을 슬하에 거느리게 된다. 구체적으로, 첫번째 아내인 경주 김씨에게서 장남인 손선익을 얻고, 두번째 아내인 고경 오씨에게서 차남 손성익과 삼남 손익채를 얻었으며, 세번째 아내인 오천 정씨에게서는 사남인 손오익과 오남인 손동익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그대로 손사설이 끝까지 지킨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절대로 아내와 이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처를 한 경우에만 자식들을 키우기 위하여 재혼을 한 것이다. 그것이 시골 양반인 손사설이 지키고 있는 가문의 법도이다. 그러한 손사설의 방침에 따라 월성 손씨의 세거부락인 상신에서부터 이혼을 금지하며 조강지처가 죽은 경우에만 재혼을 허용한다는 강력한 규율이 엄격하게 적용이 되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손사설의 장남인 손선익이 대가 끊기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형보다 15살이나 연하인 이복동생 손성익이 일찍 결혼하여 자신의 장남인 손성벽을 형의 집에 대를 잇도록 양자로 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차남인 손성규와 함께 부친 손사설의 소망을 이루고자 한다. 그 소망이 바로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개천가의 넓은 땅을 모두 개간하는 것이다.
어째서 손사설의 장남인 손선익이 아니고 차남인 손성익이 부친의 뜻을 이루고자 끝까지 진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가 삶의 태도의 차이이며 둘째가 성격의 차이로 보인다. 장남인 손선익의 경우에는 아들이 없으므로 큰 재산을 일구어서 물려 주고자 하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이복동생인 손성익이 자신의 장남을 양자로 삼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 너무나 고마워서 그는 집안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고 그만 고향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떠난 형 대신에 집안의 장자의 구실을 한 자가 차남인 손성익이다. 그는 상신에서 부친상을 당했을 때의 나이가 고작 21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그 젊은 나이에 큰 결심을 하고 있다.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한 것이다.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모든 돌밭을 문전옥답으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삼은 것이다.
손성익은 39세에 뒤늦게 얻은 차남 손성규와 함께 끈질기게 개간일에 매어 달렸다. 새벽에 눈만 뜨면 개천가로 달려나갔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얻으려고 하는 그의 집념은 집요했다. 그러한 부친의 근성을 아들 손성규가 이어 받았다. 그는 25세에 부친 손성익의 장례를 치르고 3년상을 지내는 대신에 곧바로 개간하는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형식적인 시묘살이 3년보다는 부친의 숙원사업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는 효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손성규는 그의 나이 50이 되는 1874년에 그 개간사업을 일단락하게 된다. 그 때는 고종이 즉위한지 11년이 지난 시점이며 대원군이 일선에서 물러난 그 다음해이다. 고종이 민비의 도움을 얻어 친정을 시작한 그때에 손성규가 내남 상신에서 명실상부한 천석꾼의 지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집안의 경사이다.
그 일을 시작한 것이 그의 조부인 손사설이 36세가 되는 정조 시대 1780년경이라고 보면 실로 100년 가까운 세월 그것도 3대에 걸친 노력과 집념으로 그 사업이 일단 마무리가 되는 대단한 결실을 얻은 것이다. 요컨대, 내남 상신에서 새로운 천석꾼의 지주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며 그 자랑스러운 집안의 가주가 바로 손성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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