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15강(사26:5-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3일(토)
악인의 행태와 종말, 그것을 바라보는 의인의 기도(사26:5-10)
본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구절의 순서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인 진술을 위하여 구절을 재배치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악인의 정의 및 그 행태(사26:10)
(2) 악인의 종말에 관한 예언(사26:5-6)
(3) 의인의 정의 및 그 행태(사26:7-8)
(4) 의인의 기도의 내용(사26:9)
이제 위와 같은 순서로 본문의 깊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도다”(사26:10); 이사야는 악인의 특징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악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은총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쉽게 달리 표현하자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주고 계시는 복입니다(창1:26-31). 하나님께서 복을 공평하게 주고 계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사람들이 이 땅에서 빛을 쪼이고 산소를 호흡하며 기쁨으로 생명을 누리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그 복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 복은 모두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에게는 적게 나누어주고 자신이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자신만의 혹은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면서 타인이나 타 집단의 권리를 침해하고서 상대적인 이익을 많이 취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3) 둘째,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 걸음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주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4) 그 복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일쑤입니다. 설혹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혜택이므로 갚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렇게 억지주장을 계속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만 거짓을 행하며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불의한 자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셋째,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하나의 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상은 마치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주문만 외우면 그 램프의 거인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자기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존재 또는 어떤 것이든지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한갓 능력이 많은 종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복신앙이며 우상입니다.
(6) 그러한 불의한 자의 신앙의 모습은 흰 고양이든지 검은 고양이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켜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현대인들의 도구주의 실용사상에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따라서 어처구니가 없게도 찬란한 과학문명을 자랑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전세계적으로 기복적인 우상종교와 문화가 만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로, “(5)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사26:5-6); 묘하게도 대조적인 방법을 이중으로 사용하여 의미의 전달을 명료하게 해주고 있는 문장입니다;
(1) 우선,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와 ‘빈궁한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솟은 성’과 ‘곤핍한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사26:5-6). ‘빈궁한 자’와 대조가 되고 있으므로 자연히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는 좋은 주거지 ‘uptown’에 살고 있는 자 곧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솟은 성’은 곤란한 경우를 당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로서 그 도시의 상층부 특권층입니다. 특히 정치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이라고 하겠습니다.
(2) 악인들의 말로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그들의 세상나라가 다음과 같이 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국이 망하고 세상임금이 쫓기어나고 있습니다. 아울러 부자와 귀족들의 특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짓밟히고 있던 가난한 자와 하층민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 억압자들인 악인들을 도리어 짓밟고 있습니다”(사26:5-6 의역).
(3) 다음으로, ‘거주한 자’와 ‘성’(城, castle or city)을 대조하고 있습니다(사26:5). 전자는 개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후자인 ‘성’은 집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부유하다고 하여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으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차별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권력을 독점하여 집단적인 특권계층이나 귀족층을 형성하고 많은 다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 역시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4) 또한 ‘낮추시며’와 ‘진토에 미치게 하셨다’를 의미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사26:5).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부로써 가난한 자를 억누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악인의 부를 없애버리십니다. 한편, 특권층이 구조적으로 하층민을 양산해놓고서 대대로 지배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더 강력한 처벌을 하십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두 영원한 죽음으로 보내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진토’라는 무덤의 용어 속에 담기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26:7-8); 제7절에서 ‘정직’이라는 용어가 두 번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제8절에서는 ‘주의 이름’과 ‘주’라는 용어가 달리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하나의 문장에 같은 용어가 두 번이나 사용이 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강조용법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이 정직하시기 때문에 그 형상을 닮아 있는 의인도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인생길이 평탄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적극 도와주신다는 이사야의 설명입니다.
(2) 예를 들면, 창세기 제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부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고 있습니다(창3:10). 정직하게 그 앞에 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의인의 길을 떠난 사람의 행태입니다.
(3) 인생길 가운데 의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악인은 자신들이 바로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이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사26:8a)입니다.
(4)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26:8b);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며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출3:14);
1) 스스로 있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창조주입니다(창1:1, 요1:1-3).
2) 그리고 현재 곧 ‘지금 여기’(now here)를 살고 있는 인간들의 시공간적인 제약성을 훌쩍 뛰어넘고 있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요4:24).
3) 이상 두 가지의 차이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한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그 영적인 실체가 가물가물한 법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의지하여 창조주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 분을 의지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4)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을 계시해주지 아니하시면 도저히 사람들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과 존재하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마11:27). 따라서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합니다. 나아가서 창조주를 직접 만날 수 있기를 우리들의 영혼이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이사야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26:9); 인생이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 더욱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사26:9a). 악인들이 성도들을 많이 탄압하는 시절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러한 때에 간절히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와 그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악이 만연하여 주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그때에 부디 완전한 심판이 아니라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혹독한 심판 가운데 비로소 창조주의 살아계심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악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사26:9b 의역). 그와 같은 의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구주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주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굳게 믿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사12:1-6).
결론적으로, 이사야가 본문 가운데서 예언하고 있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섭리는 언뜻 보면, 압제자를 끌어내리고 탄압을 받던 자들이 그들을 다시 억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사26:5-6). 하지만 그 깊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26:9)고 이사야가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제 뜻대로 제 욕심껏 살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막상 심판이 닥치고 있을 때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부디 용서를 베풀어달라고 울부짖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한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이사야는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듯이 훗날 이 땅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하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한번의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고 주님을 영접하는 기적이 발생할 수 있도록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이사야처럼 기도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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