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14강(사26: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2일(금)
시온에 세워지는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네 가지(사26:1-4)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 땅 시온에 새로운 예루살렘 성읍이 세워질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사26:1a). 그리고 그 성읍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을 것임을 차례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구절을 따라가면서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사26:1); 여호와께서 새로 창조하시는 새 예루살렘 성은 구원과 영생의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성에는 내벽과 외벽이 있습니다. 그 내성과 외성을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 성이 구원의 성이 될 수가 있다고 이사야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특징입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그 두 성곽을 견고하게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구원과 영생의 새 예루살렘 성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사야는 그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서 그날에 부르게 될 것이라고 그의 선지서에 싣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그 노래를 동족들이 자손대대로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내벽과 외벽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개념이 과연 무엇이기에 구원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그 설명이 다음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째로,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사26:2); 새 예루살렘 성에는 내벽과 외벽에 각각 성문이 있습니다(사26:2a). 그 성문을 모두 통과하여 영생의 성에 들어올 수 있는 자들의 특징을 이사야가 그의 예언 가운데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 (사26:2b)입니다.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옳다고 믿고서 언제나 그 편에 서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새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의 특징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의리를 지키는 종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눅17:10, 요6:66-71). 그들의 이름이 이른바 ‘생명 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훗날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습니다(계21:27).
반대로 해석을 해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따라서 행동하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편을 들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 경우에는 혹시 외벽의 성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벽의 성문까지 통과하여 확실하게 천국으로 입장할 수가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점을 경계하고 있는 예언으로 새겨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 성도들은 너나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옳다고 믿고서 믿음의 길을 평생 동안 완주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에는 끝까지 견디지를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집니다(마13:21). 뿐만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마13:22).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용사도 신앙생활 가운데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한 마디로, 마음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심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육신적인 욕구와 죄의 소원을 모두 다스릴 수가 없으니 도와달라고 하는 호소입니다.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롬7:25, 8:1-2)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 곧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자, 마음 속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그토록 원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자를 주님이 강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도와줄 줄 알고 신뢰함으로 정직하게 호소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평강을 회복하도록 역사해주시는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사26:3 의역). 따라서 성도들이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성도들이 남은 인생 가운데 있어서 완전히 쓰러지지 아니하고 믿음의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을 구태여 찾아보자면 “여호와께서 지키시는 구원의 외벽”(사26:1)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천국을 의미하는 하늘의 성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장차 이 땅 시온에 임하는 성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내벽의 성문을 통과하여 그 성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남은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그 외성이 크게 확장이 되고 있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도 믿음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평강을 회복하고 만족하게 그 평강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4); ‘반석’의 뜻은 시몬 베드로의 새 이름과 그의 신앙고백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된다는 뜻으로 주님이 그를 ‘반석’(셈어인 히브리어로 ‘게바’, 헬라어로 ‘베드로’, 라틴어로 ‘페테로스’)으로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성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장차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또 한 차례 ‘반석’이라는 용어가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마16:18).
그런데 본문에서는 ‘영원한 반석’(사26:4)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이 되고 있는 반석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계21:14a). 그 성의 성곽에는 12기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계21:14b). 그렇다면 본문의 뜻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하는 자가 바로 열두 사도와 같은 성도들이며 그들이 천국의 돌에 그 이름자를 새기는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확실한 믿음생활의 승리의 비결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그 말씀이 현실에 정확하게 맞는지 않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를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청지기로 그리고 신실한 종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끝에 부활이 있고 천국에의 입성이 주어질 따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본문에서 동족들에게 유다 땅 시온에 장차 임하는 새 예루살렘 성의 특징에 대하여 네 가지의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그 성에는 내벽과 외벽이라는 두 겹의 성벽이 있는데 그 모두를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지켜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침입할 수 없기에 그것은 완벽한 구원과 영생의 천국입니다.
(2) 둘째로, 누구에게 성문을 열어줄까요? 그 입국의 대상자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믿음의 의리를 지킨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입니다.
(3) 셋째로, 심지가 견고한 자 곧 하나님 말씀을 굳건히 지키기 위하여 마음 속으로 결단하는 자를 이 세상에서 도와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구원의 외성이 이 세상에 확장이 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4) 실제로 성도들이 세상의 유혹과 풍파 그리고 환난 가운데 쓰러지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넘어졌다고 하여 믿음생활이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승리가 성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성도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도와주고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평강의 회복입니다.
(5) 넷째로,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경험과 지혜로 여러 차원이 높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를 모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생명의 창조주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나서는 것입니다.
(6) 신앙생활의 기본은 그 분이 주인이고 자신은 종이라고 하는 본분을 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을 끝까지 영위하는 자가 이 땅에서 교회의 반석에, 나아가서 천국 성문의 기초석에 그 이름을 새길 수 있는 믿음의 스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 사실을 음미하면서 우리 모두 천국의 평강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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