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11강(사25: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9월 29일(화)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섭리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평가(사25:1-3)
창세기 제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스스로 총평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자신이 엿새 동안에 창조한 천지만물과 사람들을 보니 “보기에 참 좋았더라”(very good to see)는 평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평가가 ‘very good’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 그만 타락하고 부패가 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망하게 하는 사회와 환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경영을 위임 받은 사람들이 그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존중하고 그 말씀의 뜻을 좇아서 살아갔더라면 피조세계는 여전히 살기에 좋은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해진 세상을 장차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벌하고 다시 심히 좋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까요? 그것이 선지자 이사야의 궁극적인 관심사항이며 그의 대 선지서의 주제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골짜기의 환상을(사22장) 보여주시고 역사섭리의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깨달은 사실을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에게 전달해주라고 하십니다(사1:1, 2:1, 6:8-13).
그 가운데 특히 이사야는 먼 훗날 이 땅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말심판과 구원에 대한 내용까지를 미리 알게 되자 그 내용을 제24장에 일종의 종말묵시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5장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종말심판 및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이사야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 평가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한 절씩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奇事, 기이한 일)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25:1);
(1) 이사야가 여기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 대목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사25:1a)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사21:10, 22:15, 23:9, 24:15)라고 하는 선민들의 집단적인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지금도 자신의 인생을 주권적으로 섭리하고 계신다고 하는 깨달음 위에 서있는 신앙고백입니다.
(2) 그와 같은 개인적인 신앙고백은 귀하고도 드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 선지서인 이사야에 있어서도 겨우 5차례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사7:13, 25:1, 49:4, 5, 61:10). 그렇다면 이사야는 왜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며 동시에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3) 이사야는 선민과 이방인 그리고 해양국가와 대륙국가의 흥망성쇠와 그 장래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과 말씀을 통하여 이미 살펴본 선지자입니다. 그 결과 그는 이제 그와 같은 역사적인 환경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위대한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 요체는 환경과 역사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인생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떠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가? 이제 본문에서 그 점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기록함으로써 종말묵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4) 이사야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과 그 평가 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주는 기사(奇事)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25:1d)는 것입니다. 그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사야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두 가지 일이 참으로 기이합니다; 첫째로, 자신을 포함하여 창조되어 있는 세상 모두가 놀랍고 경이로운 것입니다. 사람의 힘과 지혜로 도저히 그렇게 만들 수 없는 세상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저 자연이 빚어놓은 신기한 세상이라고 그렇게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묵시와 계시를 통하여 이사야가 얻은 결론은 우연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놀라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높이고”(사25:1b).
2) 둘째로,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며 이사야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영하심과 일하심이 실로 경이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단지 세상을 만들어놓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이 되도록 끊임없이 감찰하고 또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계십니다(사19:22).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죄악이 도를 넘고 있을 때에는 역사적인 심판을 행하십니다(창15:16, 왕하21:11-13). 마지막에는 종말심판을 행하시고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간 성도들을 구원하십니다(사24:14-15).
3)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그 점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라”(사25:1d)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편과 상황이 변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선포하신 내용 그대로 역사를 섭리하시고 구원을 행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시고 절대적으로 지키시는 그것이 진리이며 신실함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5) 작은 결론을 맺어보자면, 사람들은 변절하고 자신의 이익을 좇아서 거짓말을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평가 곧 자신이 깨닫고 있는 하나님과 그 역사하심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신의 하나님을(사25:1a) 높이고 있습니다(사25:1b).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키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사25:1c)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사25:2); 사람이 살고 있는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들고 황폐하게 하시는 것은(사25:2a)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은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외인의 궁성’(사25:2b)을 여기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역사를 이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왕국이 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나라가 다시는 건설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25:2c). 따라서 이방나라들이 때가 되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제멋대로 살다가 종말의 심판을 받을 것인지 그것을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인류역사의 종말을 이사야가 영적으로 바라보고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의 간구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셋째로,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사25:3); 이사야는 인류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임하고 있음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외면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우상을 섬기고 기복적인 종교행위를 계속하게 되면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사24:16b-20). 그것은 사탄과 함께 영벌에 들어가는 심판입니다(사24:21-23). 따라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회개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동족의 구원만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선민을 역사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이방인 강대국들에 대해서도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와 같이 소원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든 인류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가 영원한 심판이 아니라 영생의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과 종말심판의 두려움을 보고 깨닫고 전하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사야는 만민구원을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메시아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지 그리고 어떠한 나라를 건설하시는지를 그가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11:1-9). 그래서 이사야는 자신 있게 이방인까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사25:3). 여기서 유다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강한 민족과 포학한 민족들은 이사야 당시에 있어서는 앗수르와 애굽의 제국이라고 하겠습니다(사19:25).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인류역사의 종말을 내다보면서 하나님 심판의 두려움을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목적은 그의 동족들이 더 이상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지 말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부디 삶의 방법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이방인들에게도 자신의 기록이 전달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공평하게 다루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그가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모두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만민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높여야만 합니다(사25:1b).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만 합니다(사25:1c). 왜냐하면, 선민의 나라 이방인의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결산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각자의 인생 끝에 심판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1) 남과 하나님과의 문제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내 민족 내 나라가 하나님 앞에 장차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보다 사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가 더 우선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한 마디로, 이사야는 환경과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심을 본문에서 먼저 고백하고 있습니다(사25:1a).
(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이사야가 경이롭게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세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이 빚어놓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해놓으신 세상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사25:1b).
(3) 피조물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살고들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약속하신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그와 같이 언약에 신실하신 ‘헤세드’ 하나님의 이름을 이사야가 찬송하고 있습니다(사25:1c).
(4) 선민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이사야가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탄생하시며 메시아가 건설하시는 영원한 나라의 속성에 대하여 이사야가 계시를 받고서 예언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사11:1-9). 그러므로 이사야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돌아오는 자는 모두가 종말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사19:25).
(5) 그와 같은 내용을 개인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사25:3).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다시 한번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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