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16강(사26:9-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0월 4일(주일)
주의 심판의 손을 바라보지도 아니하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지고 있는 구원의 방법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사26:9-15)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동족 유대인들에게 전할 예언의 말씀을 위탁 받은 선지자입니다(사1:1, 2:1, 6:1-8). 그가 동족들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대선지서 이사야입니다. 그 주 내용은 동족인 유다 왕국의 백성은 물론 모든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의 미래와 그 종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의 말씀을 이사야에게 위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1) 이사야가 전할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선민들조차 그 의미를 깨닫지를 못하고 믿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사6:9-10).
(2) 그러자 마음이 답답해진 이사야가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선민들이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사6:11)
(3) 하나님의 대답은 제사장나라가 망하고 또 거룩한 백성들의 사회가 깨어지고 그들의 후손들이 이방세계를 떠돌면서 고생을 엄청 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 말씀의 씨를 다시 신앙의 그루터기로 삼게 될 것이라는 답변입니다(사6:11-13).
따라서 이사야는 동족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 이상한 대화의 내용을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 가운데 그의 깨달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구절을 따라가면서 깊은 묵상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26:9); 이미 지난 번 강해에서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에 요점만 정리합니다. 사람들이란 육체에 갇혀서 한평생을 살고 있는 영혼들입니다. 인생 가운데 온갖 유혹과 시험 그리고 환난과 풍파가 캄캄한 밤과 같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한 가지 간구를 하나님께 끊임없이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한번의 기회를 더 허락해달라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에 임하는 창조주의 마지막 심판을 당할 때에 비로소 자신들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삶의 모습과 편협한 정의실천의 부작용을 심각하게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도다”(사26:10);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환경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인간관계가 모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은총을 입고 있으면서도 악인들은 그 고마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서 제멋대로 이기적인 탐욕을 쫓아서 한 평생 불의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예 창조주의 살아계심과 복 주심 그리고 그 엄중하신 심판을 외면하고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바로 악인들입니다.
셋째로,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사26:11); 그와 같은 악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이 이사야의 중보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기도가 상달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그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방법론이 복음의 내용으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악인들조차) 부끄러워할 것이라”(사26:11b)는 내용입니다.
그 구원의 방법론은 정확하게 ‘메시아의 열심과 고난’(Passion of Christ)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그것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인지도 모르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여 자신을 대속의 희생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시는 그리스도의 열심과 고난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악인들은(롬3:9-12) 부끄러움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종말의 시기를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단 한번의 마지막 구원의 기회입니다.
그와 같은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전후하여 어떤 일들이 있거나 발생하는지를 이사야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손을 드시고 역사적으로 여러 번 심판을 행하고 있지만 그 징계의 방법으로는 사람들이 회개를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사26:11a). 그러므로 마지막 남은 방법은 직접 징계가 아니라 메시아를 대속의 제물로 대신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대속의 징계를 보고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아니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불 심판이 임하고 영벌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사26:11c).
넷째로,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26:12);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귀책사유의 전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강의 회복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잘못이 그리스도에게 전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제3장의 내용을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사탄의 화신으로 보이는 간교한 뱀이 아담부부의 욕심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종용했습니다(창3:1-7). 그 결과 영생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한 관계 곧 ‘평강’이 깨어지고 불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약1:15) 그 사망의 빌미를 사탄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화의 근본원인인 사탄의 세력을 쳐부숨으로써 그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의 시작을 창세기 제3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메시아)은 네(사탄의 화신인 뱀)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다섯째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26:13); 모세는 일찍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면)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가 인생 길에 더불어 닥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선택하여 그를 의지하고 섬겨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진정한 장수의 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신30:19-20 의역).
이사야가 본문 이 대목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모세의 권면과 동일한 것입니다. 진정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 곧 하나님과의 평강의 회복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의 은혜 안에서 가능함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다는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다.
여섯째로,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사26:14); 그렇다면 우상과 그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종말론적인 처벌의 내용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이사야의 예언은 임종을 맞이하여 죽음의 잠을 자게 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깨우러 오시는 메시아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요5:24-29, 11:11-14).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죽음 다음에 부활과 심판이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냐 아니면 완전한 사망이냐가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2) 우상과 그 우상을 섬기는 삶으로 일관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번 죽게 되면 다시 깨어난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완전한 사망으로 처리가 되고 맙니다(사26:14a).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벌로써 그들을 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시는 형벌입니다(사26:14b). 그러면 그 영혼까지 완전히 소멸이 되고 말 것입니다(마10:28).
일곱째로,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사26:15); 하나님의 영광은 스스로 창조하시는 창조주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능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창조주의 능력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그 규모와 범위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제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땅을 멸하시고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늘과 땅입니다(사65:17).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설입니다(사65:18). 그곳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기운이 흘러 넘치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사65:19-25).
결론적으로, 이사야의 다채로운 예언은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개념으로 수렴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 성도들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소망이기 때문입니다(히11:13-16, 25-26, 계22:20-21). 그와 같은 소망을 담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은 훗날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게 되면 드디어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내려오게 됩니다”(계21:1-8).
그렇게 이 땅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 경계는 하늘과 땅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이성과 삶의 한계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해답의 실마리는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새로운 영적인 몸과 그 승천의 비밀 속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눅24:49-53, 요20:17-23). 한 마디로, 완전한 구원과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부활의 몸을 입고 승천을 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 바울도 그것을 얻고 싶어서 남은 인생을 다 바쳐서 오직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빌3:7-14). 그러므로 이왕 신앙생활을 하고자 했으면 사도 바울처럼 그 푯대를 향하여 부지런히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달려가는 성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강해 제118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2 |
---|---|
이사야 강해 제11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2 |
이사야 강해 제11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0 |
이사야 강해 제11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10 |
이사야 강해 제11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