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70강(사13: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8월 20일(목)
앗수르에 대한 심판, 바벨론에 대한 심판, 또 그 다음은 누구에 대한 역사심판인가? 이사야는 완전한 종말심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인류의 역사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해주는 본문의 기록(사13:1-5).
짧은 본문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사야가 앗수르 제국의 멸망과 신바벨론 제국의 성립 및 멸망에 대하여 어떻게 사전에 알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넘어서고 있는 완전 미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앗수르나 바벨론 등이 하나님의 분노의 몽둥이로 사용이 되다가(사10:5, 15) 다시 버림을 받고 역사적인 심판에 이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와 같은 제국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반복이 되는 것일까요? 셋째, 완전한 종말심판은 어떻게 준비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가운데 구원과 영생의 길은 어떻게 모색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넷째, 이사야는 본문의 예언을 하면서 무척 신이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함께 묵상을 통하여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사야가 앗수르 제국의 멸망과 신바벨론 제국의 성립 및 멸망에 대하여 어떻게 사전에 알 수가 있었을까요? 한 마디로,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미래지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선지서의 기록이란 후인들이 역사를 소급하여 마치 예언서인 것처럼 꾸며서 저술해놓은 기록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소위 ‘위작설’(僞作說)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한결같이 사람의 상식과 이성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고 하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과학지상주의’에 불과합니다. 이제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하여 먼저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으며(사6:1) 주로 웃시야의 손자인 아하스 왕과 그 증손자인 히스기야 왕 때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기간은 앗수르가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승승장구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게 되는 신바벨론 제국이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본문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선지자는 미래를 일부 통찰할 수가 있는 예지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게 되는 그와 같은 능력을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학문적인 분석능력과 이해의 능력이 과학이라고 한다면 애초부터 창조주의 지식과 지혜는 그것을 초월하고 있는 경지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에 관한 기록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창1:1-2). 만약 창조주가 피조물의 학문과 과학 속에 갇히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신을 설정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유신론이 아니고 유물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만사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맡겨버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져 있는 이성적인 판단과 지성적인 노력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알 만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태초부터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했습니다(창1:26).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시고 있습니다(창18장). 인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고 상식과 이성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으니 어찌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둘째로, 앗수르나 바벨론 등이 하나님의 분노의 몽둥이로 사용이 되다가 다시 버림을 받고 역사적인 심판에 이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와 같은 제국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반복이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정의를 외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현할 수가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될 때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는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라시고 하나님의 뜻을 복음으로 외치게 됩니다. 그 외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만을 위한 여호와가 아니시다 라는 것입니다. (2)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며 그들도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욘1:2, 3:2, 4:11, 마12:41). (3) 자신과 자기들의 민족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정의로써는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4) 따라서 하나님 앞에 모두가 죄인임을 깨닫고서 그 앞에 다시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줄 것이며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외침입니다.
셋째로, 완전한 종말심판은 어떻게 준비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가운데 구원과 영생의 길은 어떻게 모색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초대 왕 여로보암 때부터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일시적인 회개로 앗수르 군대에 의한 멸망을 면하게 된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도 훗날 신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지상 마지막 제사장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 역시 고레스의 페르시아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헬라 제국, 로마 제국, 대영제국, 미국에 의한 세계평화 등으로 세계의 역사가 끊임없이 전개되며 또한 수 많은 제국들이 명멸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피곤한 역사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그리고 종말전쟁으로 마침내 끝이 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종말적인 구원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요? 그 대목에 대하여 본문에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 가운데 일부를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멸망시키는 가장 교만한 세상의 제국이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지상세력 곧 마귀의 제국이기 때문입니다(사14:4-23, 계18:2-21). 창조주를 무시하고 있는 세상나라 모든 임금들의 총합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바벨론이기에 그 제국을 멸망시키는 이사야 예언의 장면이 바로 묵시적이며(사21:2-10) 계시록의 기록과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이사야는 본문의 예언을 하면서 무척 신이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군대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의 임금들이 쫓겨날 것입니다(요12:31). 당장 역사적으로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가 신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의미는 훗날 종말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다시 오셔서 군대를 이끄시고 세상나라를 전부 정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계19:11-21). 사탄의 세력과 적 그리스도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체포되어 심판에 처해질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구원과 부활의 기회가 제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종말전쟁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선지자 이사야가 여기서 당장은 신바벨론 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이 나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 (2) 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3)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를 불러 나의 노여움을 전하게 하였느니라. (4) 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남이여, 많은 백성의 소리 같으니 곧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 (5) 무리가 먼 나라에서, 하늘 끝에서 왔음이여, 곧 여호와와 그의 진노의 병기라. 온 땅을 멸하려 함이로다”(사13:1-5). 중요한 대목만 간추려서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사13:2a);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는 이유는 사면팔방에서 누구나 쉽게 그 깃발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대장의 깃발은 각 군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누구나 그 깃발의 모양과 색깔을 보고서 무슨 작전을 수행해야만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이미 이사야가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만민을 구원하는 깃발로 세우신 것입니다(사11:10). 둘째,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열방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끌어 모으는 깃발로 삼으시고 있는 것입니다(사11:12).
(2)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사13:2b); 역사적으로 신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게 되는 고레스 황제의 페르시아 군대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군대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잠시 펴기 위하여 한동안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존귀하신 자 곧 하나님의 성전의 문에 들어가는 군대는 다릅니다. 그들은 성도들이며 종말전쟁을 위하여 동원이 되는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3)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를 불러”(사13:3);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이 신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는 페르시아 군대의 위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지상 마지막 제사장나라인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제국은 묵시록과 계시록에 있어서 의미상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있는 세상나라와 권세의 총집합으로 간주가 되고 있습니다. 그 세상나라를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군대로 불러 모으시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적으로는 영적인 전쟁이, 종말론적으로는 마지막 전쟁이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4)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사13:4a);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가 되고 종말이 오게 됩니다(마24:14). 그러므로 열국 민족이 모두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성스러운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5)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사13:4b); 다윗 대왕이나 모세를 시켜서 군대를 점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직접 검열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모든 세력이 집결이 되어 있기에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시고 그 전쟁을 진두 지휘하는 것으로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계19:11-16).
(6) “무리가 먼 나라에서, 하늘 끝에서 왔음이여”(사13:5a); 이 땅에서의 성도들만 동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들도(마26:53) 그 마지막 전쟁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7) “온 땅을 멸하려 함이로다”(사13:5b); 바벨론을 사탄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이 지상 마지막 전쟁 곧 종말전쟁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 위하여 세상 온 땅을 멸하는 전쟁이 있게 될 것입니다(벧후3:12, 계20:7-10, 21:1).
결론적으로, 이사야의 본문의 예언은 겉으로 보면 제사장나라 다윗의 왕조를 멸망시킨 신바벨론 제국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와 상징성을 추적해보면 그것은 종말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은 일종의 묵시록이며 계시록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시공간을 뛰어넘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오늘 날 자유스러운 사람이나 국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겸손하게 옷깃을 여미고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살아가다가 바벨론의 군대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처럼 살아감으로써 메시아의 군대에 들어갈지를 결정해야만 한다고 하겠습니다”. 쉽게 이해를 하자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인민군으로 끌려갈 것인지 아니면 한국군에 입대를 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1950년대 초에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변명을 할 수가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21세기인 오늘날에는 그 변명이 불가능합니다. 깊이 생각을 하여 스스로 선택을 하도록 이미 하나님께서 충분한 시간을 주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선택을 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께서 선택하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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