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61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10. 16:24

이사야 강해 제61(10:20-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811()

 

이스라엘의 남은 자야곱의 남은 자의 개념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이사야는 그들이 각각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분리하여 예언을 하고 있는가?(10:20-23)

 

첫째로,야곱이스라엘은 그 이름의 뜻이 다릅니다;

(1)  에서의 쌍둥이 동생의 이름이 야곱입니다(25:24-26). 동생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함께 모태에서 빠져 나왔기에 그 이름을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라고 부른 것입니다(25:26a). 야곱이 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을까요? 그 이유를 먼저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고대사회는 장자가 족장이 되며 가문의 모든 재산을 상속합니다. 그러므로 동생들은 큰 형이 족장이 되면 그의 신하가 되는 운명입니다. 동생의 가족들도 모두 족장을 섬기는 종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족장사회의 철칙을 알고나 있는 것처럼 에서와 야곱은 서로 먼저 태어나고자 모태에서부터 격렬하게 싸운 사이입니다(25:22). 그러나 결론은 힘이 센 에서가 승리를 하고 맙니다. 야곱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력을 다하여 형의 발꿈치를 잡고서 태어났지만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2)    그때부터 야곱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77세가 될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매어 달린 사람입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장막에서 하나님에게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25:27-28). 그는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서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b). 꾀를 사용하여 형의 장자의 명분과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쟁취하기 위하여 행동으로 나선 사기꾼의 이름이 바로 야곱입니다.

(2)  야곱이 죽음의 위기에서 두 차례나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신의 꾀와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형 에서의 위협과 가나안 원주민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얍복 시냇가입니다(32:23-30). 그 다음은 세겜을 벗어날 때입니다(34:30-35:13). 야곱이 세상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부디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오자 비로소 그의 운명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이란 이름을 믿음으로 운명을 바꾸고 승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이스라엘이라는 칭호의 뜻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과 역사서 그리고 선지서 및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창세기 제48장 마지막 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48:21-22). ‘야곱의 이름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 이스라엘로 바뀌자 그의 운명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패배자가 승리자로 뒤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세겜 성 주변의 원주민들이 겁이 나서 벧엘로 도망을 치던 야곱입니다(34:30). 그러나 믿음의 대 족장 이스라엘이 되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겜 성을 정복하여 그 땅을 자신의 목축지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37:12-17, 48:22).

(2)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는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계승하고 있는 그들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신앙을 가지고 참여한 많은 족속들이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12:38). 그러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으로 분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7:4-8, 21:12, 26).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열두 사도의 이름도 새 예루살렘 성에 초석의 이름으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21:14).

(3)  역사적으로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열 지파가 참여하고 있는 왕국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은 소위 선민들의 나라라고 크게 자랑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왕국을 미워했습니다. 선민들은 이웃나라들을 오랑캐 보듯이 하면서 이방민족들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민정책과 혼혈정책 그리고 종교적인 우상화 정책을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실시했습니다;

1)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점령하자 그 나라에서 쓸만한 인재와 인력을 모조리 앗수르 제국으로 끌고 갔습니다(왕하17:23).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웃하고 있는 앗수르 제국 내의 백성들을 그 땅으로 들여보냈습니다(왕하17:24). 그것이 땅을 빼앗고 제국의 백성을 대신 들여보내어 그 땅을 경작하면서 살게 만드는 이른 바 식민정책입니다.

2)    강제로 혼혈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장정들을 많이 앗수르 제국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대신에 앗수르 제국의 장정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살게 했습니다. 자연히 혼혈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선민의 피의 순수성을 말살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열 지파가 사라지게 됩니다. 족보가 사라지고 열 지파의 이름이 사라집니다. 유일하게 훗날 남은 이름이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2:36) 정도입니다.

3)    종교적으로 우상을 만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을 섬겼더라”(왕하17:33). 여호와 하나님도 이방 신이나 우상의 하나로 간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4)  사라진 열 지파를 대신하여 어떠한 사람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요?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군대가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37:1),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37:10-12).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부활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군대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야곱이스라엘의 차이를 위와 같이 인식을 하고서 보면 야곱의 남은 자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1)  야곱의 남은 자는 혈통적으로 선민이었던 자 가운데 남은 자가 된 사람입니다.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신앙을 끝까지 올바로 지켜서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원 가지인 이 사람들에 해당하는 자입니다(11:24).

(2)  사실 야곱의 남은 자로 볼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제2성전을 재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고자 화려한 페르시아를 떠나서 황폐화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파수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모두 유대인입니다. 나아가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받은 대부분의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대다수도 유대인들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남은 자의 헌신과 공로가 대단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3:2, 11:12, 15:27).

(3)  이스라엘의 남은 자야곱의 남은 자와 다릅니다. 사도 요한이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1-14).

(4)  풀이를 해보자면, 혈통적인 유대인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관건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처럼 말씀을 생활화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위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이제 본문을 간단하게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10:20); 언뜻 보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을 당할 때에 살아남은 자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대나 권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신앙의 회복이 관건이 되고 있으므로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접한 백성으로 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세상만민 가운데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돌아온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은 남조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한 후에 더 이상 외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신앙만을 붙들고서 그리스도에게 피난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유대인들을 예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3)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10:21-22);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극히 적을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선민만의 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유대인들의 정의가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공의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이 전통적인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회심사건을 보더라도 그러합니다(9:1-19).

(4)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10:23); 선민과 이방인 구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 남조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지(豫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모든 이방나라들도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음을 선지(先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을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 똑같이 다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거침없이 선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5)  모든 인위적인 구분과 차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온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오로지 세상의 권력과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자 생명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남은 자들만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파멸에 차별이 없듯이 구원에 있어서도 차별이 없습니다.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신앙으로 정직하게 돌아오는 남은 자이면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의 눈에는 이미 두 개의 제사장 나라의 멸망이 보이고 있습니다. 137년 사이에 선민의 나라가 모두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방나라들이 하나같이 전부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창조주를 무시하고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여 제멋대로들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는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인위적인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차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 끝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남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와중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민 유대인 출신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이스라엘로 불릴 수 있는 이방인출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자들”(10:20)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에 그리스도가 서 있다고 미리 말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해당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