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58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9. 03:38

이사야 강해 제58(10:5-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88()

 

왜 나를 보내어 제사장나라를 치게 하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그 답을 듣지 아니하고 스스로 답하고 있는 앗수르의 교만에 대하여(10:5-8)

 

앗수르 제국은 특별한 나라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제사장나라를 초토화시킨 최초의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는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아예 지도상에서 그 흔적을 지워버립니다(왕하17:5-24). 그리고 남조 유다 왕국을 침략하여 한때 예루살렘만 제외하고 전국을 점령하게 됩니다(왕하18:13-17). 앗수르의 약탈과 횡포가 나라의 멸망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의 심각한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나라 앗수르를 동원하여 제사장나라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는 거룩한 백성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아예 모르고 있는 앗수르를 동원하고 있는 것은 역사섭리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하여 이제는 그 대답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하여 본문을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10:5);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그리고 분노의 몽둥이로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나 나라는(10:5b) 참으로 조심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멀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그 자신에게 닥쳐올 것이기 때문입니다(10:5a). 그것은 한 마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치는 것)의 전략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로,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10:6); 제사장나라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이방나라와 같이 되고 말았을까요? 이방세계의 강대국 앗수르를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제사장나라를 치시는 것은 이미 선민들이 오랑캐와 같이 변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이사야는 내가(하나님이) (앗수르)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타락한 제사장나라)를 치게 하며”(10:6a)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민들의 나라가 이방강대국의 침략과 약탈을 받게 되는 더 가까운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10:6b). 요컨대, 선민들이 영적으로 타락할 뿐만 아니라 악행을 일삼아서 하나님을 노엽게 하면 그때에는 이방강대국을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징계를 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2)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일까요? 가장 알기 쉬운 설명이 유다 왕 므낫세의 행적 가운데 다음과 같이 적시가 되고 있습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버릴지라”(왕하21:11-13).

(3)  그 옛날 가나안 땅의 원주민의 대표였던 아모리 족속의 악행이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자 그 땅에서 축출이 되고 말았습니다(15:16, 9:4-5). 마찬가지로 제사장나라의 악행이 이방인 아모리 족속과 진배없이 되었기에 동일하신 하나님의 똑 같은 심판이 역사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선민이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한 수를 접으시고 보아준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은 착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선민 이방인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똑 같은 피조물이며 자식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 도다.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10:7-8); 하나님께서 의롭지 아니한 사람이나 나라를 동원하여 한때 의로웠던 백성을 치고자 하시는 경우에는 조심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정작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신 다음에는 그 분노와 심판이 자신에게 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는 옷깃을 여미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전해주고 있는 선지자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며 그들의 뜻 역시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10:7a). 그렇다면 당시 이방인들의 뜻과 생각을 대표하고 있는 강대국 앗수르의 황제의 논리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두 가지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1)  정복욕에 불타고 있습니다;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10:7b).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아니 계시게 되면 스스로 생존하며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강한 욕구가 하나님을 대신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권력에의 욕구와 의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방강대국 앗수르의 황제도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사야가 설명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2)  상승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10:8). 강대국의 왕이면 이미 엄청난 영화를 누리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왕국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게 되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요? 그러나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아니 계시게 되면 자신의 분수를 깨닫고 만족을 얻지를 못합니다(4:13-14). 더 상승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앗수르의 왕은 국가의 발전목표를 다음과 같이 내걸게 됩니다; “나의 신하인 그대들을 모두 왕으로 봉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넓은 봉토를 얻을 수 있도록 정복전쟁에 앞장을 서도록 하라”. 그것은 마치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운 지파에게 더 많은 땅을 분배해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다만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그 땅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능력과 힘을 주셨다고 하는 인식이 있습니다. 동시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으므로 그 땅에서 쫓겨났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황제의 경우에는 그와 같은 말씀과 인식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전략과 능력으로 더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하들에게 적당하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자신의 손발과 같이 잘 사용함으로써 광대한 제국을 얼마든지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심을 해야만 합니다. 앗수르처럼 분노의 몽둥이로 사용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로워서 상대방을 치는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끊임없는 소유욕과 지배욕 그리고 신분상승의 욕구를 지니고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고 계신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10:5)는 이사야의 예언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가 필요가 없음)을 당하지 아니하는 방법은 크게 쓰임을 받는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인지를 자신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신앙생활의 방법론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