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56강(사9:18-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8월 6일(목)
위로 올라가는 악행과 분노의 불길, 그 결과 초래되는 지극히 두려운 여호와의 진노의 역사, 그리고 그 진노를 거두게 만드는 회개의 기도에 대하여(사9:18-21)
첫째로, 이사야는 사람들의 악행과 분노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악행은 불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사9:18).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내 산에 강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성막을 지으라고 모세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성막의 양식을 보여주시면서 지성소 내 언약궤와 그 뚜껑인 속죄소에서 말씀으로 모세와 대제사장 아론을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출25:22). 그리고 평상시에는 지성소 휘장 바로 바깥에 향단을 두고서 향을 피우도록 조치하십니다(출30:6-8). 그 이유는 마치 향의 연기가 지성소 안으로 스며드는 것과 같이 백성들의 간구와 기도가(계5:8) 하나님 전으로 올라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성도들의 기도와 연기뿐입니다. 그 연기는 제물과 향을 태울 때에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출29:41-42). 그런데 본문에서 또 다른 연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분노로 악행을 일삼게 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구체적으로, 억울한 피해자의 절규가 기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출2:23). 그리고 악행으로 말미암아 불타는 성읍 및 자연환경에서 발생하고 있는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마치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사9:18c)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사람의 분노가 처음부터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악행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처음에는 그 분노가 단지 찔레와 가시를 삼키고 있습니다”(사9:18a). 일반적으로, 땅을 밭으로 개간을 할 때에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바로 찔레와 가시입니다. 그것들이 자라서 군락을 이루게 되면 가축과 사람이 아예 접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창이나 칼처럼 사람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자생력과 번식의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찔레와 가시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찔레와 가시를 누군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제거를 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망에 부응하여 정의로운 자가 나타나서 의로운 분노로 찔레와 가시를 제거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지지를 받을 것입니다.
(2)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회적인 암적 존재를 처리한 다음에 대중의 지지를 받아 집권에 성공하고 나면 그 본색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사9:18b). 한 마디로, 과거의 의로운 분노가 이제는 자신들의 뜻에 어긋나는 집단들에 대하여 무자비한 탄압으로 변질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엄청난 독단과 폭력에 시달리게 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게 됩니다.
셋째로, 무죄한 자의 피가 도성에 가득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반드시 반응을 하십니다(왕하21:11-13, 16).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식의 생명을 돌보고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해하기에 쉽지가 않습니다; “(19)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20) 오른 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사9:19-21). 묵상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어보고자 합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사9:19a); 여호와의 진노는 패악해진 세상을 심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심판에서 잘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죄한 자의 피를 땅에 흘리게 되면 그 피를 받아 먹게 되는 땅이 황폐화되고 맙니다(창6:11-12). 그리고 사람의 포악함은 짐승들을 흉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악한 인간과 더불어 포악해진 짐승들을 함께 처벌하게 됩니다(창6:13a). 물론 그 모집단이 되고 있는 땅도 처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창6:13b). 그와 같은 내용이 제19절 전반부입니다.
(2)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20) 오른 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사9:19-20); 설혹 의로운 동기로 분노가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제할 수 없는 경우에는 형제를 해치게 되는 악행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사9:19b). 사람에 대한 인류최초의 범죄가 카인이 자기의 형제인 동생 아벨을 살해한 것임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창4:8). 당연히 그 범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됩니다(창4:11-12).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떠나시면 행악자가 세상에서 권력과 폭력을 마음껏 휘두름으로써 대리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깊은 좌절과 허무함 때문에 결국은 자기자신을 스스로 해치고 말 것입니다. 그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사9:20).
(3)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사9:21a);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창48:1). 에브라임 출신 여로보암이 훗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 됩니다(왕상11:26, 12:20). 당시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지탱하고 있는 유다 지파 및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가 모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구성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배족속은 여로보암의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리고 그 지배를 받고 있는 지파는 므낫세 족속을 비롯한 9지파가 됩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본문에서 알기 쉽게 북조 이스라엘의 지배자를 에브라임, 피지배족속을 에브라임의 형제인 므낫세로 부르고 있습니다.
(4) 에브라임 출신인 여로보암 왕의 아들 때에 잇사갈 지파 바아사 장군의 반란으로 정권이 잇사갈 지파로 넘어가게 됩니다(왕상15:27-28). 그것을 이사야가 제21절에서는 상징적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이의 형제의 난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북조 이스라엘이 남조 다윗 왕국을 치는 것을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연합하여 역시 형제인 유다 족속을 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단순화한 역사적인 설명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해치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분노이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악행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5)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사9:21b);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와의 전쟁,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형제간에 서로 죽고 죽이고자 하는 골육상쟁을 바라보고서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심판이 앗수르 제국에 의한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당장 나타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조 유다 왕국의 멸망 순서입니다. 그럴지라도 회개하고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린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사9:21b). 실제로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주전 701년 앗수르 산헤립 군대의 제2차 침입 때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왕하19:35).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하나님께 매어 달렸기 때문입니다(왕하19:14-19).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에 의지하여 살 길을 도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 왕조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흔히 분노하게 되면 쉽게 악행을 행할 수는 있지만 그 가운데 과감하게 용서의 손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진노 가운데 여전히 용서의 손을 펴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편 팔과 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서 자신과 왕국의 최후가 오기 전에 회개하고 진심으로 매어 달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창조주는 살아계셔서 새로운 질서와 운명을 오늘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 가운데서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힘 입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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