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5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9. 22:13

이사야 강해 제59(10:9-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89(주일)

 

정복전쟁을 일삼고 있는 중동의 강대국 앗수르의 유물론적 논리와 선지자 이사야의 유신론적 논리(10:9-14)

 

성경의 가장 큰 주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지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그리스도를 보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1:1, 3:16). 그러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살지를 말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15:20-24)”. 쉽게 말하자면, 유물론적인 입장을 버리고 유신론적인 입장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신실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분노의 몽둥이로 쓰임을 받고 있는 앗수르 제국이 오만불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 계신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다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장차 그들은 나름대로의 쓰임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들이 그와 같이 교만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들이 의지하고 있는 논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차례대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10:9); 한 마디로 앗수르가 제국을 형성하는 동안에 차지하게 되는 큰 요새와 적국의 수도를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역사적인 배경과 더불어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사야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된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6:1). 그러므로 그는 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 통치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 시기는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두고서 신흥 앗수르와 카스피 해 남방의 강대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입니다. 그 틈을 노려서 북조 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2세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영토를 많이 차지했습니다. 웃시야 왕도 남서쪽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좋은 시절은 앗수르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역의 패권을 쥐게 됨으로써 끝나게 됩니다.

(2)  티크리스 강 유역을 전부 통일한 앗수르는 이제 유프라테스 강 중류와 상류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격전 끝에 점령한 군사적 요충지가 갈그미스갈로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람 왕국과 북조 이스라엘 왕국으로 쳐들어가기 위하여 서북쪽의 두 요충지를 차지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르밧하맛입니다.

(3)  이쯤 되자 안보에 크게 위협을 느끼게 된 서쪽의 세 나라 곧 아람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다 왕국 사이에 반 앗수르 동맹을 형성하고자 논의가 진행이 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먼저 군사동맹이 성립이 됩니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가 이에 응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아하스 왕의 판단으로는 그들 두 나라와 연합하여 앗수르 제국에 대적을 하는 것보다는 두 나라가 먼저 강대국 앗수르와 싸우는 것을 관망한 다음에 자신의 행로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들 세 나라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틈을 노려서 유다 왕국이 실리를 챙기거나 우세한 진영에 가담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영악하게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에 연합군 진영에 참전하여 가장 큰 실리를 차지한 구 소련의 행태를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4)  하지만 아하스 왕의 판단은 북조 이스라엘의 왕 베가나 그 북쪽의 르신 왕의 조급하고 모험적인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입니다. 베가는 쿠테타로 왕위를 찬탈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공포정치를 펴고 있습니다. 그는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는 유다의 아하스 왕을 징계하고자 합니다. 아람의 르신 왕에게는 함께 앗수르를 치기 전에 배후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남조 유다 왕국을 먼저 치자고 제의를 합니다. 무모하기로는 아람의 르신 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코 앞에 앗수르를 남겨두고서 먼 나라 유다를 먼저 치고자 베가 왕과 함께 군사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5)  사정이 급하게 된 유다 왕국의 아하스 왕은 강대국 앗수르의 황제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왕하16:7). 앗수르 황제는 이웃 세 나라 사이의 전쟁을 즐기면서 하나씩 빈집털이’(10:14)를 시작합니다; “주전 733년에 아람왕국의 수도 다메섹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11년후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6)  드디어 주전 701년에는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가 제2차 원정에 나서서 유다 왕국 대부분을 점령하게 됩니다. 수도인 예루살렘 만이 살아남아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상황에서 최후통첩이 있게 됩니다(왕하18:17). 그때 산헤립 황제의 명령으로 예루살렘 성에 외친 랍사게 장군의 최후통첩의 내용이(왕하18:19-35) 일부 본문에서 미리 공개가 되고 있습니다(왕하18:34, 10:9).

(7)  지금까지 말씀 드린 전쟁의 흐름을 참조하면서 이사야 제10장 제9절의 내용을 묵상해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앗수르 황제는 티크리스 강 유역을 통일한 다음에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가장 큰 요새 갈그미스를 어렵게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작은 철옹성 갈로(또는 갈레’, 10:10)가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말을 듣지 아니하자 그들마저 정벌을 하고 말았습니다.

2)    승승장구한 앗수르는 시리아의 아람 왕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그 사이에 있는 두 요새 아르밧하맛마저 정복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아람 왕국의 수도 다메섹을 쉽게 얻게 됩니다(왕하16:9). 그 이유는 얼빠진 아람 왕 르신이 북방경계를 소홀히 한 채 이스라엘 왕 베가와 함께 남조 유다 왕국 정벌에 나서 있었기 때문입니다(왕하16:5). 때 마침 유다 왕 아하스가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고 있으므로 남과 북에서 협공을 한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홀로 남게 된 이스라엘을 쳐서 그 수도인 사마리아를 초토화시키고 맙니다(왕하17:5-6). 한 마디로, 앗수르 제국의 군사적 행보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정복하지 못한 나라나 요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10:9). 실로 중동의 지배자다운 광오(廣傲, 크게 오만함)한 말씀입니다.

둘째로,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 도다”(10:10-11); 앗수르의 황제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이며 제국 내에서 자신이 절대권력자입니다. 자신 위에는 그 누구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황제의 뜻을 따라 황실과 제국에 다산(多産)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도구로서의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의 황제는 이웃나라들도 모두 각각 자신들만의 우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호국(護國, protecting nation)의 우상들입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복을 당한 나라들의 우상이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황제인 자신보다도 힘이 약한 우상들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떠들고 있는 너희들도 별 수가 없을 것이다. 나의 군대가 정복한 나라는 너희들의 나라보다 더 강했으며 그들의 신전들은 너희들의 성전보다 더 화려했다. 그리고 그들의 우상은 너희들의 신보다 더 힘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모조리 내가 정복을 했다. 이번에 점령한 사마리아의 이스라엘은 너희 유다와 같은 신을 섬기고 있는 나라가 아니냐? 그들의 신도 별 수 없이 나에게 왕국을 내어주었으니 너희들도 나의 군대에 의하여 곧 망하고 말 것이다”(10:10-11).

셋째로,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10:12); 선민들이 타락하자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북조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멸망을 당할 나라는 앗수르 제국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몽둥이로 그 역할을 다한 다음에는 더 이상 존속시킬 필요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10:5, 12).

그런데 변수가 하나 훗날 발생을 하게 됩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과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살려달라고 겸손하게 매어 달리기 때문입니다(왕하19:14-19).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서 우상을 섬기는 앗수르 제국을 징벌하시고 그 대신에 회개하는 선민들의 나라를 구원해주십니다(왕하19:35). 그 옛날 요나의 시대에 이방나라의 수도 니느웨의 왕과 그 백성들이 회개를 할 때에도 심판을 구원으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3: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를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에야 얼마나 흔쾌하게 용서를 해주시겠습니까?(15:19-24)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훗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11:24).

넷째로,그의 말에 나는 손의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 도다”(10:13-14); 다음과 같이 쉽게 요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앗수르의 황제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 세 가지의 큰 일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첫째, 많은 나라를 점령하여 하나의 제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다양한 민족들이 같은 제국에 살면서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여러 나라의 재물을 약탈하여 더 큰 재물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더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다. 그 이유는 더 큰 경제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큰 자본력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기 용력만 믿고 힘으로 맞서는 자들의 무릎을 모두 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무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아니라 겸손하게 학문과 기술을 닦아 제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2)  그와 같이 좋은 방향으로 해석을 하고 보면, 앗수르 황제의 말은 오늘날에도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절대로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대목이 곧이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없는 세상을 자신이 차지한 것이니 그 누구도 시비를 걸 수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는 대목입니다(10:14ab).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 크게 부끄러움을 당할 만한 구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10:14c). 그렇게 많은 나라를 정복하여 하나의 제국을 형성해오는 동안에 유물론적인 그와 같은 사고방식과 정복전쟁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시비를 걸어온 인물이나 나라가 하나도 없었다는 대목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이사야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정복전쟁에만 눈이 멀어 있는 앗수르 황제의 주장을 깊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주인이 없는 무주물(無主物)로 생각하여 힘으로 먼저 차지하면 그만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오만한 제국을 좌시하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멸망을 시키고 마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창조주가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지 아니한 자 나아가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외치지 아니한 선민들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오만하게 세상을 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유물론적인 세상에 창조주의 뜻을 제대로 전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지 아니한 성도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