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52강(사9:5-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8월 2일(주일)
불완전한 나라들, 그들의 갈등과 분쟁의 역사적 반복을 마침내 끝내는 하나님의 지혜와 그 완전한 방법에 대한 언급(사9:5-7)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 되면 인류의 불안한 전쟁의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를 아니하고 완전히 종식이 될 것으로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9:5-6a).
또한 그리스도가 불완전한 갈등과 분쟁의 역사를 온전히 청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을 이 땅에 드러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政事, 다스리는 일)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奇妙者, 기이하고 신묘한 일을 행하는 사람)라, 모사(謀士, 일을 꾸미거나 계획하는 사람)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永存, 영원히 존재함)하시는 아버지라, 평강(平康, 평안하고 강건함)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熱心, 열렬한 마음)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b-7). 이제부터 하나하나씩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사9:5); 적군과 아군이 서로 어울려 어지러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이 모두 벗겨지고 있습니다(사9:6a). 그 대목은 모세가 호렙 산에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시나무 불길 가운데 만나고 있는 장면을 연상하게 해줍니다(출3:1-5).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면 그 땅은 거룩한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선 자는 모두 전쟁을 멈추고 전쟁터로 달려나가는 그 분노의 신발을 벗어야만 합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의미가 바로 “군인들의 피 묻은 겉옷이 불길에 휩싸여서 완전히 태워져 버리는 것”(사9:5b)입니다.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일이 훗날 그리스도 예수가 못 박히게 되는 십자가 앞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로마병정들의 채찍에 맞아 그 겉옷이 피에 낭자하게 됩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그 겉옷을 벗겨냅니다. 그리고 서로 가지려고 제비 뽑기를 합니다(마27:35).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피 묻은 겉옷을 처분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끝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군인들의 피가 묻은 겉옷을 하나님이 그 신위적인 능력으로 불살라버림으로써 다시는 전쟁의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하는 의미가 다분히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9:6ab); 반복되는 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징조가 임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보통 아기와 똑 같아 보이는 한 아기가 탄생하고 있습니다(사9:6a).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특이합니다. 인류의 긴 역사 가운데 전혀 같은 예를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사9:6b).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는 하나의 깊은 내용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지 아니하면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 곧 그 반목과 질시 그리고 전쟁의 반복을 결코 끝낼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온전히 위임 받아 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인류의 죄를 없이하거나 그 악행을 끝장낼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요컨대, 사람들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는 이미 자정(自淨, 스스로 정화함)능력을 상실한 채 공멸(共滅, 다 함께 멸망함)의 종말을 향하여 계속 달려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그의 어깨에는 정사(政事, 다스리는 일)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奇妙者, 기이하고 신묘한 일을 행하는 사람)라, 모사(謀士, 일을 꾸미거나 계획하는 사람)라”(사9:6c); 보통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브레이크가 없이 낭떠러지로 굴러가고 있는 인류의 전쟁의 역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정사, 기묘자, 모사’라고 하는 세 가지 용어 속에 담겨 있습니다;
(1) 정치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지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단순하게 세상임금을 쫓아내고(요12:31)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가 모든 권세의 머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펴는 역사를 시작하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마28:18, 엡1:21-22). 그리스도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의식해야만 합니다. 구태의연하게 권력정치를 해서는 안됩니다. 정치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기묘하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으로 풀어서 제자와 백성들에게 복음으로 교훈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특히 세상의 지혜 및 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주석적 히브리정경풀이와는 상당히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3) 사람이 도모하는 일은 그대로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의 성사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람이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성사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발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도록 맡겨드려야만 합니다. 과연 그러할 수가 있을까요? 엄청 어려운 일입니다.
(4) 그리스도 예수의 경우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발걸음을 자꾸만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고뇌가 심각합니다.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매어 달립니다. 부디 다른 방법을 강구해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방법 외에는 만민구원을 위한 죄 사함의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히시기 직전에 온전히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모사는 계획에서부터 그 실행의 방법까지 그리스도가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永存, 영원히 존재함)하시는 아버지라, 평강(平康, 평안하고 강령함)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c);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인간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인자 예수님이시지만 그 속에는 신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선재하시며 시공간을 넘어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롬8:37-39). 온전한 평안과 강건함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9-11).
다섯째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사9:7a);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게 진행이 되어오던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가 다음과 같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정치에 하나님의 뜻이 더욱 담기게 됩니다. (2)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안과 강건함을 옷 입게 됩니다(요삼1:2). (3) 다윗처럼 왕국을 접수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두렵게 여기는 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삼상24:6-7, 26:9-12). (4) 그리고 다윗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자신에게 주는 징벌을 달게 받고 새로운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고자 결심을 하는 자들이(삼하12:13-15, 22-23)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행2:34-35, 13:22).
끝으로,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熱心, 열렬한 마음)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bc).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정의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집단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자기의 이익과 자기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 해주는 명분을 모두들 정의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의 충돌은 그들 집단 사이의 정의의 충돌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그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치유할 수가 있을까요? 인간의 힘과 지혜로써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의 조정의 지혜가 반드시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공의의 정신으로 이 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숨쉬는 나라입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피조물을 바라보며 평등하게 대하고 주님과 같이 대접하는 나라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제대로 가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결단력이 대단하십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사9:7c)고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공멸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역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과 분쟁 나아가서 분노의 전쟁을 영원히 그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적인 개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는 그때를 앙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역사가 달라질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하나님의 공의가 사람들의 제 각각인 정의를 다스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이익과 정의를 옹호하고 있는 선민의 종교 대신에 공의를 실천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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