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49강(사8:16-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30일(목)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대신에 이제는 어떤 사람들에게 증거의 말씀과 율법을 맡기고 계시는가? (사8:16-18)
제8장 제9절에서부터 제11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사야는 동족인 유대인 선민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 계시면 민족의 힘을 결집하여 이룩해놓은 모든 성과가 끝내 패망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 허리띠를 조여가면서 건설해놓은 경제적인 부의 결과가 그러하며 함께 허리에 띠를 띠고 구호를 외치며 일구어놓은 국가발전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사8:9). 요컨대, 하나님의 지혜를 빌리지 아니하고 인간들이 계획하고 실행한 것들이기에 그 결과는 허망할 뿐이라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유대교지도자들이 앞장을 서서 믿음 대로 그리고 신념대로 이루어진다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지만 모두 성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단언하고 있습니다(사8:10a).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선민들이 따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사8:10b).
이사야의 지적은 동족인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 백성들에게만 적용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백성(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의 길로 가지 마십시오”(사8:11b). 세상만민에게 동일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민 유대인만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강한 손’(사8:11a) 곧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지금도 계시의 말씀 그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세상만물과 만민을 모두 섭리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이사야가 외치고 있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교의 선민사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만을 보호하신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라는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임마누엘의 은혜가 이 땅에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7: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자신의 영혼의 주인으로 섬기며 두려워할 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성소가 임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사8:13-14). 그것은 성령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의 시대를 벌써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 이사야의 예언에 대하여 위와 같은 깊은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들여다보게 되면 다음의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사8:16a);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섭리(攝理)라고 하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배후에서 치리(治理, 이치에 맞게 다스림)를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창조주가 하나의 원칙을 세워서 자연과 역사를 경영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 인지(認知, 오감과 이성을 통하여 알게 됨)의 방법에 대하여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게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隱秘, 은밀하고 신비함)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사48:5-7). 간단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믿음의 조상들을 통하여 이미 알게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사48:5a).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계시의 말씀과 장래 하나님의 역사를 미리 알게 해주는 예언의 말씀들이 믿음의 조상들을 통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시기 전에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예언의 말씀을 다시 한번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사48:5b, so called, ‘recommitment’ or ‘reconfirming’). 그 이유는 막상 그 예언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 섭리자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주기 위함입니다(사48:5c). 그것이 바로 증거의 말씀입니다.
(3) 사람들이 우상과 이방 신을 의지하여 아무리 외치고 서원을 하며 계획을 하고 함께 일을 도모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일들은 패망하고 성사되지를 못할 것입니다(사8:9-10, 48:5). 그 이유는 사람의 인생과 역사의 주인이 오로지 창조주 한 분 뿐이심을 고백하면서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4) 그 창조의 일은 일회성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는 지금도 살아서 역사와 인생을 주관하시며 새로운 역사를 계속 만들어나가고 계십니다(사48:6-7). 그러므로 신앙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 뜻을 종의 입장에서 충실하게 실천해나가야만 합니다.
둘째로,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합하라”(사8:16b); 증거의 말씀과 관련하여 율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실현이 되고 있는 율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율법 가운데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진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가운데 들어 있는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본래의 취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율법을 적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율법의 뜻을 이제는 선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만 깨닫도록 섭리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과 율법에 있어서 이제는 선민들이 버림을 받고 있으며 이사야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위임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을 참조하면, 세상 모든 족속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백성이며 소유물입니다(출19:5a). 그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의 자손을 세상제국인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여 시내 산으로 인도해왔습니다(출19:4). 그 목적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출19:5b-6). 풀이를 하자면, 온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창조주의 말씀을 전하고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뜻을 저버리고서 자기들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세상적인 복을 크게 누리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한 집단이기적인 생각이 의식화된 것이 선민사상이며 종교적으로 제도화된 것이 소위 유대교입니다. 따라서 선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먼저 말씀의 뜻과 율법의 취지를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사6:9-12, 8:16). 그러할지라도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어나가실 새 시대를 바라보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임마누엘로 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이며 만민구원의 새로운 언약의 시대입니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8:17),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10).
셋째로,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사8:18); 새로운 시대 곧 복음의 시대의 일꾼은 누가 될까요? 선민들이 그 일을 맡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선민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구분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선정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그 일을 맡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사8:18a). 그리고 이사야는 자기에게 주신 자녀들이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의 예표가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사7:3, 8:3).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남는 자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는 자’는 선민의 사회가 멸망을 당하는 가운데 살아남는 세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자’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진정한 만민구원의 뜻을 깨닫고 선민사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오래 걸리지를 않는다는 의미가 바로 이사야의 차남의 이름 ‘마헬살랄하스바스’의 뜻입니다. 실제로 700여년 후에 그러한 역사가 이 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오심과 초대교회의 시작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진의를 깨닫지를 못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집단이기적인 방법으로 종교행위를 일삼았다고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율법이 한결같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매사 그 뜻을 듣고서 의사결정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그러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선민들이 하는 일마다 성사가 되지를 못하고 패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아하스 왕의 시대가 특히 그러합니다.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선민 이방인이라는 인위적인 구분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선민에게 말씀과 율법을 위탁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와 그 자녀 그리고 제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 그리고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위탁할 것입니다.
그 시대를 열망하면서도 이사야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동족들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나와 나의 자녀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오니 부디 나의 동족들을 버리지 마시고 많이 구원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와 같은 선지자 이사야의 마음이 다음 구절에 절절하게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족들의 구원을 위하여) 나는 기다리며 (끝까지) 그를 바라보리라”(사8:17).
이 시간 아무쪼록 선지자 이사야와 동일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 간구하기를 원합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 부디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대로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그리고 만주에서 시베리아를 거쳐서 유럽의 끝까지 열리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하여 한반도와 한민족이 빨리 통일되도록 역사를 섭리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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