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4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4. 01:00

이사야 강해 제46(8:5-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727()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과 급히 흐르는 세상의 물(8:5-8)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선민들 곧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중요한 선택을 잘못했다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8:5-8).

겉으로 보면, 굉장히 야단을 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은혜가 넘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제부터 함께 본문의 깊은 내용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8:5-6)는 대목에서 선민들이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 실로아의 물은 천천히 흐르고 있는 반면에 세상의 변화는 빠르고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여기서 실로아 물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말씀 드린 그대로 하나님의 임재와 그 역사를 가리키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와 같이 볼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실로아 물이라고 하는 용어는 영적으로 한 때 실로에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궤와 성막을 염두에 두고서 만든 상징어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18:1). 둘째, 기드론 시내 기혼의 샘물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끌어들여 실로암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그 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왕상1:33-34, 38-40, 9:7, 18:1).

(2)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기업을 분배할 때에 실로에서 행했습니다(18:10).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 언약궤와 성막을 실로에 설치했기 때문입니다(18:1). 실로의 위치는 세겜과 벧엘 사이입니다. 정확하게는 벧엘의 북동쪽 15km지점입니다. 실로를 하나님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신성한 성막의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겜은 함께 출애굽한 요셉의 유골을 안치한 장소입니다(13:19, 24:32). 그리고 벧엘은 조상 야곱의 하나님신앙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있는 실로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28:12-22, 35:8-15).

(3)  참고로, 세겜은 그 옛날 족장시대에 가나안 땅의 중심지입니다(12:6,  33:18-20). 야곱의 집안은 처음에는 세겜의 원주민들을 두려워하여 남쪽 벧엘로 피난을 했습니다(34:30-35:5). 하지만 벧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대 족장 이스라엘로 우뚝 선 야곱이(35:10) 훗날에는 그의 칼로써 세겜을 정복하게 됩니다(48:22). 그 결과 세겜에서 북방의 도단까지 그의 목초지가 펼쳐지게 됩니다(37:12-17). 그와 같이 벧엘과 세겜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승리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승리가 여호수아가 이끌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에 의하여 재현이 된 것입니다.

(4)  실제로 기혼 샘에서 솟아나온 기드론 시냇물은 천천히 흐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동쪽기슭(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 18:1)에 흐르고 있는 그 물을 남쪽으로 천천히 흐르게 솔로몬 왕 때에 수로공사를 하여 왕의 저수지’(king’s pool)에 모아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앗수르 군대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하여 밖으로 드러나 있는 솔로몬의 수로’(Solomon’s Tunnel)를 폐쇄했습니다. 그 대신에 기혼의 샘물을 안전하게 예루살렘 성내로 끌어들이는 지하수로공사를 했습니다. 기혼샘물 근처 시혼에서부터 지하수로를 뚫어서 성내로 끌어들였습니다. 533미터의 긴 수로공사를 단기간에 끝내기 위하여 성내 실로암 저수지에서도 동시에 굴착공사를 했습니다. 그 지하수로가 이름하여 히스기야 터널’(Hezekiah’s Tunnel)입니다.

 

 
 
기혼샘과 로겔샘(엔로겔) & 실로암 터널과 히스기야 터널왕의 못과 실로암 못의 위치(자로출처; 노재명의 성지)

(5)  지하수로를 통하여 천천히 은밀하게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기혼의 샘물이며 시혼의 샘물입니다. 그것을 실로암 저수지에 모아서 생명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덕택에 예루살렘 성을 장기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군대는 인근에 물을 얻을 수가 없어서 6개월의 가뭄을 맞이하여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때마침 본국에서 전란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산헤립은 급히 퇴각을 하고 맙니다.

둘째로,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8:7-8a)는 예언은 세상적인 힘을 우상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징치(懲治, 징계와 치리)하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금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대목은 선민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 백성들에게 국한이 되고 있는 예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아니하며 그 신중한 절차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마치 그 옛날 사울 왕과 같이 전사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삼상15:11, 23, 26:10, 31:6). 사울 왕의 사례를 살펴보자면, 기본적으로 전쟁은 급한데 대제사장이며 대사사인 사무엘의 행차가 무지하게 일주일이나 느린 경우입니다(삼상13:8-15).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이 쓸만한 전리품을 모조리 태워버리라고 하는 비이성적인 것입니다(삼상15:3, 9).

(2)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다가는 적에게 유리한 고지를 모두 빼앗기고 나서 전투를 치를 형편입니다. 부관들과 군사들이 빨리 전투개시명령을 내려달라고 재촉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정의 급함을 이유로 대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약식으로 사울 왕 자신이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섭니다(삼상13:5-12). 급한 일을 급하게 처리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장 효율적이며 이성적인 대안이 오히려 하나님의 눈밖에 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3)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와 합리적인 명분을 가지고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명백하게 거짓이며 비이성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데 근본적인 식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신앙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대응이 적의 공격보다 엄청나게 느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고자 하는지 아니면 효율적이고도 빠른 대응을 할 수 있는 세상적인 방법론을 따를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4)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방법이 세상의 방법처럼 빠르고 효율적이라고 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까요? 그 결과는 혹독한 심판과 죽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이 신중하고 그 역사가 천천히 임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한 자들에게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급하게 판단하시고 그대로 처벌을 감행해버리신다면 모두가 죽은 목숨들입니다. 그 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가 있겠습니까?

(5)  예를 들면,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범한 다윗을 그 자리에서 심판하고 처벌해버렸다고 한다면(삼하11:4-17),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해버린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총독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당장에 강력하게 처벌을 하셨다고 한다면(26:65-66, 27:20-26) 기독교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요? 기본적으로,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5:43-48)고 하는 예수님의 복음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불분명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회개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실로아의 물과 같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두 손을 벌려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10:21) 그와 같은 인내하심 가운데 깊이 엿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  반면에 다윗 왕과 같이 이스라엘 열 지파가 오해를 풀고서 자신을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할 때까지 7년 세월을 기다린 자는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삼하2:11, 3:26-30, 5:1-5). 구체적으로, 다윗은 사울의 왕국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제국을 하나님의 은혜로 건설하게 됩니다(삼하8).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애굽과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넓은 땅을 모조리 다윗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15:18).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것입니다(8:17-18).

(7)  본문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 징계로 말미암아 목숨이 위급한 형편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8:7b-8a). 그러나 히스기야와 그 신하들처럼 다시 회개하면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천천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8)  역사적으로, 급하고 흉흉하게 쳐들어오던 세상의 패권국 앗수르의 군대가 천천히 지하수로를 따라서 흘러 들어오고 있는 기혼의 샘물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물러가게 됩니다. 선지서와 역사서에 따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대군 185천명을 하룻밤 사이에 말살하기 때문입니다(왕하19:35, 37:36).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의 부왕인 아하스는 아둔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9)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느리지만 은밀한 역사를 전혀 이해하거나 의지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저 즉효가 나타난다고 하는 세상적인 외교력과 군사력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급하게 내침하고 있는 북쪽 두 왕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당장 강대국 앗수르의 황제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두 가지 나쁜 소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완충역할을 하고 있는 북방의 두 나라 아람과 이스라엘이 차례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유다 왕국이 강대국 앗수르와 국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둘째, 이리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가까이 끌어들인 셈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서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 오는 것입니다.

셋째로,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8:8b)고 하는 예언은 놀랍게도 그 참혹한 땅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용서와 풍성한 은혜를 미리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버린 그들을 고쳐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입니다(1:6-11). 그 은혜가 풍성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선민사상을 버리고 만민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는 자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죄 사함을 받고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를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9).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마치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과 같이 흘러온다고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효율성과 효과성을 중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급하게 일을 처리하고 급한 상황에 빨리 대처를 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시상황이 되면 더욱 그러합니다. 아하스 왕 때에 북쪽의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서 함께 쳐들어올 때 다윗 왕조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적들의 군사적 행동에는 역시 전략과 군사력으로 맞서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힘이 약하므로 주변 강대국 앗수르에 원군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8:6).

다국적군을 형성하여 유다 왕국을 집어삼키고자 달려오고 있는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 왕은 모두 세상임금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다윗의 왕조는 달라야만 합니다. 제사장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있습니다. 적들과 마찬가지로 효율적이라고 하여 세상적인 방법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근본적으로 필요가 없다는 자세입니다. 상황이 급할수록 그러합니다. 요컨대, 있는 둥 마는 둥 천천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너무나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누가 기쁘게 선택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 세상사람들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흐르고 있는 그것이 매우 정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창조주이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징계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천천히 최후까지 인내하시며 신중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회복의 역사가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22-26).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천천히 흐르고 있는 실로아의 물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여(7:14),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