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45강(사8: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26일(주일)
너무나 임박한 구체적인 예언, ‘마헬살랄하스바스’(사8:1-4)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halal-Hash-Baz)라는 말의 뜻은 ‘빨리 약탈을 당하거나 망하게 된다’(quick to the plunder or swift to the spoil)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그 의미심장한 용어를 큰 서판에 글로 써서 백성들에게 보여주라고 명령하시고 있습니다(사8:1). 그리고 증인 두 사람과 함께 왕과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사8:2). 더구나 이사야의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나자 그 아이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으라고 하십니다(사8:3). 그 다음에 아주 구체적인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아람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고 그 재물이 약탈을 당하고 말 것이다”(사8:4). 다음과 같이 좀더 구체적인 묵상이 필요한 본문입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내게(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The Lord said to me, ‘Take a large scroll and write on it with an ordinary pen; Maher-Shalal-Hash-Baz’)(사8:1)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일반적으로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로써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에는 위와 같이 글로 적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는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1)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말로써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을 통하여 먼저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문자입니다. 실제로 고대사회에서 문자의 사용은 제한적입니다. 글을 적기 위해서는 양피지나 점토 판이 필요한데 그것이 고가(高價, expensive)입니다. 그리고 글을 적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모두 문자를 익히고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 경우가 흔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사는 주로 말로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계약도 흔히 구두계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이하게도 이제는 이사야에게 넓은 양피지에 크게 글자를 적으라고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단지 네 글자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그 뜻이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범상하지가 않습니다. “재물이 속히 약탈을 당하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글자로 적어서 왕과 귀족과 백성들의 눈앞에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흔히 고대사회에서 황제의 칙서나 왕의 조서를 보여주고 당사자에게 읽어주는 경우에 해당이 되고 있습니다.
(3) 그것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황제나 왕의 정책결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최종결정이 칙서나 조서로 전달이 되면 그대로 시행이 되고 말 것입니다. 훗날 신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 벨사살의 연회현장에서 발생한 기이한 일을 참조하면 그러합니다(단5:1-5). 갑자기 벽면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글자를 적었습니다(단5:25). 왕의 방자함이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으므로 그 나라를 쪼개어서 다른 두 나라에 넘겨버린다는 뜻입니다(단5:26-28).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진행이 되고 맙니다(단5:30-31).
2) 마치 구두계약과 문서계약의 차이와 같습니다. 구두로 약속한 것은 효력이 약합니다. 하지만 문서로 계약한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쌍방이 구속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말로 해서 듣지를 않으니 이제는 더 큰 구속력을 가지는 문서를 작성하여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글자를 알고 있는 지식층과 지도자 계급에게 특히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묻고 있는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내가(하나님이)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사8:2)라고 증인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계약이 이루어질 경우에 복수의 증인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과 묘답을 사고 있는 경우가 그러합니다(창23:16-18). 그리고 중요한 범죄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할 때에도 그러합니다(신17:6, 19:15). 교회에서 마지막 권유를 할 때에도 그러합니다(마18:16-17).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혼자서 그 서판을 들고 백성들에게 나아가지를 말고 반드시 두 사람의 증인 곧 제사장 한 사람과 유력한 가문의 사람 한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내가(이사야가) 내 아내를 가까이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사8:3)고 작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두 아들 ‘스알야숩’(사7:3)과 ‘마헬살랄하스바스’(사8:3)라는 이름이 모두 그의 선지서에 실려 있습니다. 장자인 ‘스알야숩’은 이사야가 예언의 말씀을 아하스 왕에게 전할 때에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대동한 것입니다. 그 뜻은 북방의 두 나라가 연합하여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어린아이 스알야숩과 같은 다음 세대가 남게 된다는 하나님의 두터운 보호하심의 뜻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차남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로 작명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지자에게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심각합니다; “빨리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임한다는 것입니다”(사8:3-4).
넷째로,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사8:4)는 내용의 임박한 예언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1) 중동의 패권국으로 일어서고 있는 앗수르 제국입니다. 그 패권국의 힘을 아하스 왕과 신하들이 뒷감당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겁도 없이 함부로 빌리고자 합니다(왕하16:7-8). 당장 북쪽의 두 나라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왕하16:5).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장자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왕에게 가서 예언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다음 세대를 보호하실 것이니 아무런 걱정을 말고 하나님신앙을 굳건히 하라”는 명령입니다(사7:3-9).
(2) 하지만 아하스 왕과 신하들이 하나님신앙을 회복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강대국의 힘을 빌리기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재차 이사야를 그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아예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경고의 글을 크게 적어서 증인과 함께 들고 가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사8:1-2).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이제 마지막 방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갓난아기 이사야의 차남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부르면서 그 이름을 이웃과 백성들 앞에서 각인을 시키라는 것입니다(사8:3).
(3) 그 이름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지 아니하면 끔찍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일종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의 두 번째 아들이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히브리어로 ‘엄마 아빠’를 발음하게 되면 그 말을 듣는 자들에게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심판이 도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사8:4). 당장은 북쪽의 두 나라가 차례로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왕하16:9, 17:6).
(4) 그 다음에는 누구의 차례가 될까요? 마지막으로 그 말을 듣는 자 곧 유대인들에게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심판이 도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이름과 그들의 말에서 터져 나오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다음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영적으로 알아채고서 기성세대가 즉시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5) 요컨대, 세상적인 방법에 익숙한 어른들이 너무나 회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순수한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다시 한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10:14-16).
결론적으로, 말로 하여 들려주는 것보다는 글로 적어서 보여주는 것이 더 강력하며 그 효력이 깁니다. 말로 해서 듣지를 않는 경우 어쩔 수 없이 구속력이 강한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차제에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이 제멋대로입니다. 그 결과 선지서의 내용 그대로 멸망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떠한 회개와 구원의 방법이 남게 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의 글이 직접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 인생으로 생생하게 친히 보여주는 방법만이 남게 된다고 하겠습니다(눅24:44-49). 실제로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속에는 이미 ‘마헬-살랄-하스-바스’의 경고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고 있는 그때부터 세상과 인생은 심판을 향하여 초읽기에 들어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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