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48강(사8:11-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29일(수)
세상을 섬기는 자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근본적인 차이(사8:11-15)
세상을 섬기는 자는 세상적으로 성공을 하는데 삶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권력과 힘의 논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삶의 목적 및 방법론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창조해놓은 천하만물을 잘 돌보며 살아있는 피조물의 생명을 모두 살리는 것입니다. (2) 그 일을 행하자면 헌신과 봉사 그리고 희생이 따릅니다. 때로는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서 상대방의 생명을 살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세상적인 방법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적인 삶의 목적과 방법을 내려놓아야만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3) 한 마디로, 자신은 종이며 하나님 아버지가 주인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청지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상급이 주어지게 됩니다(요8:35).
반면에, 세상적인 성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인생을 살아온 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구원과 영생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뒤늦게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면서 주여 주여 부르짖을지라도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마7:21).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실천하는 인생을 살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평생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서 제멋대로 자기 좋은 대로만 인생을 살아온 결과가 그렇게 허무합니다.
세상을 섬기며 살아온 자는 결코 죄와 사망의 법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롬8:2). 마치 가룟 유다와 같은 그러한 자를 향하여 그리스도가 측은하게 한 마디를 하실 것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했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달리 태어났더라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끝까지 살아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을 터인데 그만 잘못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곁길로 가버렸기에 유일한 인생의 목적인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위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본문을 들여다 보게 되면 세상적인 목적과 수단으로 일관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사8:12a);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죄의 본질은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무시하고 신하가 왕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죄의 본질이며 속성인 것을 세상적인 논리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반역자가 없도록 철저를 기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집안단속을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반역의 조짐이 있다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자들이 그와 같이 바늘방석에 앉아서 평안을 잃어버리고 불안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잊어버리지 말라고 이사야가 권면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8:12b-13).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정상에 섰다고 하더라도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으며 영생을 확보하고 있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혹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서 후세의 역사에 불멸의 위인이나 영웅으로 남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자신의 인생 가운데 진지하게 생명의 창조주를 만나지 못하는 이상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육체적인 죽음도 두려운 것이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의식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영혼이 영원히 소멸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이 훗날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그 말씀의 원형이 이미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여 위와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추가적인 설명이 이사야의 예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8:14-15);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는 대신에 이제부터는 성막 내 성소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출25:8). 그리고 그곳을 출입하는 자들은 제사장들과 모세에 불과합니다.
(2) 그 성소가 예루살렘 성전에 위치하고 있다가 제사장나라의 멸망으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입니다(사7:14b).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는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7:14c). 그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새로운 성소입니다(사8:14a).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징조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사7:14a).
(3) 그런데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 백성들 곧 선민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하루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그곳에서 일년에 한 차례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신탁의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소가 아예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자 이 세상에 임마누엘의 은혜로 온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사7:14c, 8:14a).
2) 그렇다면 선민만의 특권과 특혜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많은 속죄의 제사를 드리며 겨우 하나님의 신탁을 일년에 한 차례 어렵게 들으면서 종교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선민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와 같은 종래의 율법적인 종교생활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그 예언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3) 마찬가지의 이유로 정작 그리스도 예수가 유대인들의 사회에 왔을 때 그를 배척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그들의 선민사상과 어긋나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걸림돌이 되고 만 것입니다(사8:14b).
넷째로, 예루살렘 주민뿐만 아니라 선민사상을 고수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큰 재앙이 발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예언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8:14c-15).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그리스도는 함정과 올무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복음을 실천하는 생애가 심판의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예루살렘 주민에게만 적용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끝으로, 재앙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엿볼 수 있는 동사 세 가지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걸려 넘어질 것, 부러질 것, 덫에 걸려 잡힐 것 등입니다.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에게 걸려서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인생을 살아간 자가 먼저 말씀에 끝까지 순종한 그리스도라는 기준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했다고 변명을 하는 자들도 걸려서 넘어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생 가운데 가능했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다시 바른 신앙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2) 걸려 넘어지고 실족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 경우가 부러지는 경우입니다.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이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면서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유대교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의롭다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저항을 하게 되면 가장 귀히 여기는 그것이 부서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3) 2천년 전에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덫이 된 것처럼 오늘날에는 전 세계인들에게 덫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생애가 선교를 통하여 전세계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덫에 걸리게 되느냐 아니면 덫에 걸리지 아니하느냐의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덫에 걸리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섬기는 것보다는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영혼의 아버지로 그리고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회심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을 섬기며 사는 자는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불안합니다. 여전히 죄와 사망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패역한 것이 죄의 본질이므로 세상에는 반역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 자신의 입지가 아래로부터의 반역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판국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이 두렵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성취했다고 칭송을 받더라도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서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은 다릅니다; “죄 사함의 제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성소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믿는 자들에게 임마누엘의 은혜로 오실 것임을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마음과 영혼 속에 성소를 모시고 살아가는 자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을 맛보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시대를 바라보지를 못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동족들이 안타까워서 계속 그의 선지서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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