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다윗이 시편 제103편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주님의 속량의 은혜를 영원히 송축하라고 외치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5. 09:10

제목; “다윗이 시편 제103편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주님의 속량의 은혜를 영원히 송축하라고 외치다”(103:1-22)

설교일; 주후 2021418

작성자; 손진길 목사(415일 작성)

 

시편에 수록되어 있는 다윗의 시가 73 가운데 제103편이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감사의 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어째서 다윗이 영원히 송축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으로 불리고 있는 히브리정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고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며 종말로 인류의 역사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내용이 그러한 사실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닿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미흡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론의 핵심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의 존재를 선견자들이 미리 영적으로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 제11장과 제53장 등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방법을 기술하고 있어서 그의 메시아론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 시대에 놀랍게도 다윗이 그의 시편 제103편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주님의 속량의 은혜를 벌써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윗이 주님의 속량의 은혜를 마음속 깊이 깨닫고 진심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은택을 송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어째서 우리 성도들은 그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그 의미를 먼저 알아본 다음에 시편 제103편의 내용을 한 구절 씩 살펴보는 것이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속량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알’(גֹּואֵ֣ל)인데 그것은 기업을 무른다고 하는 용어 고엘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사회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의 기업과 가문의 분깃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잃어버리거나 가문의 분깃을 팔거나 저당 잡히는 것이 선민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수치입니다.

하지만 살다가 보면 어쩔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팔거나 저당을 잡히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가까운 친척들이 돈을 모아서 그 기업을 되찾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엘제도입니다;

 그러한 고엘의 기업 무름이 없다고 하더라도 50년이 지나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 율법사회에서는 본래의 주인에게 기업이나 분깃을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본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기업과 분깃을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하여 그것을 잃어버리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불경이며 올바로 서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잘못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못을 범한 인간들을 용서하고 구원할 수가 있을까요? 환언하자면, 어떻게 본래의 신분인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다시 살아가게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와 같은 구원의 방법론이 히브리어 가알이며 한국말로는 속량’(贖良, redemption)입니다.

그것은 대속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잘못에 대한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기에 그 사실을 믿고 정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다시 본래의 기업과 신분을 회복하여 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한국말 속량이라고 하는 것은 양민이 죄를 범하여 종이 된 경우 속전을 주고서 다시 양민으로 그 신분을 환원하여 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사람의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어로 케레브’(קְ֝רָבַ֗י)라고 하는 그 말은 본래 창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게 되면 그것은 일단 창자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남의 것을 도적질하여 먹어 치우게 되었다고 의심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자신의 창자를 끄집어 내어 무죄함을 증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 속을 다 살펴보아라. 내가 남의 것을 꿀꺽한 적이 없는 것을 알 것이다”, 또는 내가 내 속을 까뒤집어 보일 수도 없어서 참으로 답답하다. 나는 무죄한 사람이다. 나는 억울하다”.

그 옛날 일본의 경우에는 사무라이의 사회에서 더 노골적입니다. 일본말로 셋보꾸라고 하는 할복을 용감하게 자행하는 경우에는 그 잘못을 면제하는 동시에 사무라이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창자라고 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 케레브역시 자신의 마음속 깊은 진심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라고 하는 의미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103:1).

셋째로, ‘송축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바라크’(בָּרֲכִ֣י)는 비슷한 용어인 쉬르자마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말로 히브리어 쉬르찬송으로, ‘자마르찬양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굉장히 좋은 번역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쉬르는 사람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마르는 악기를 사용하여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송축으로 번역하고 있는 바라크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사와 축복의 뜻이 함께 들어 있는 용어입니다. 다윗이 어째서 여호와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속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다윗이 지은 죄를 말끔하게 속죄하시고 자신을 다시 본래의 신분인 하나님의 청지기로 바로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속량 곧 가알의 은혜가 훗날 메시아의 오심으로 이 땅에 임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사모하면서 다윗이 진심으로 자신의 케레브로 여호와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하나님의 은택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송축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송축인 바라크이며 일종의 감사와 축복의 노래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시편 제103편의 내용을 한 구절 씩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그 뜻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을 고치시며, 4.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103:1-5);

(1)  1절의 내용은 모두(冒頭, 앞머리)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다만 한가지 다윗이 그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하고 있는 이유가 이 대목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구원의 은혜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새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그 이름을 송축하는 것이 실로 합당한 것입니다.

(2)  다윗은 제2절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달리 은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택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각 개인에게 미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혜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개인들이 하나같이 은택을 누리도록 그렇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골고루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훗날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동일한 구원의 은혜가 모든 피조물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 구원의 은택을 영접하느냐? 하지 아니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있습니다(1:12);

(3)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있어서 죄사람의 권세와 병고침의 은사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4:23, 9:20-22).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온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질병과 장애를 고치고 귀신을 그 몸에서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메시아의 공생애가 있을 것임을 1,000년 전에 다윗왕이 벌써 예언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제3절이라고 하겠습니다.

(4)  질병과 장애로부터 고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의 심판으로부터 그 생명을 구원받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것이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누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대속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십니다. 그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의 성품이 인자긍휼입니다(4). 요컨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하나님의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을 불쌍하게 보시고 대속자를 보내어 주시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인 인자와 긍휼이며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 것입니다. 그 점을 다윗이 제4절에서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5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로 말미암아 죄짐에서 벗어난 성도들이 얻고 있는 새로운 삶을 역동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103:5). 사람은 세월이 지나가면 병이 들고 노쇠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는 성도들은 젊음을 회복하여 여호와의 청지기로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와 같은 거듭난 삶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로 이 세상에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선견자 다윗이 벌써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6.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 도다. 7.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03:5-11);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6.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 도다. 7.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103:6-7); 여호와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모두를 돌보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피조물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는 창조주의 공의(righteousness)의 정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빠짐없이 살피시고 전부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시켜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103:6). 그 점을 훗날 사도 바울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 구원의 일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103:7).

(2)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103:8-10); 헤세드인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노하기를 더디하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103:8). 그리고 하나님의 헤세드는 긍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 보응하시는 대신에 대속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 죄짐을 대신 속죄하도록 하십니다(32:34, 1:29). 그 점을 선견자 다윗이 제9절과 제10절에서 벌써 노래하고 있습니다.

(3)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03:11);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회개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정도로 크신 것일까요? 다윗은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 은혜는 태산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절 전반). 그렇지만 그와 같은 하늘의 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옷 입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구원의 은혜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1절 후반, 삼상2:30);

 달리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보내신 대속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18.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103:12-18);

(1)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피조물들을 전부 돌보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이 완악하여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배척하고 대속자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무리들에게 대해서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의 뜻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13)라는 구절에 반대해석으로 내포되어 있습니다(1:12).

(2)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 여호와를 아버지로 모시고 영원히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 수가 있다는 특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8:35, 8:14-15). 그러므로 성도들이 거듭난 인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끝까지 살아가게 되면 나중에는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22:28-30). 그와 같은 맥락에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2)라는 다윗의 언급은 정당한 것입니다.

(3)  다윗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다가 마치 풀이나 꽃과 같이 바람결에 사라지는 일장춘몽의 인간을 불쌍하게 보시고 대속자를 보내어 그 죄과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영생을 누리게 하셨으니 진실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택을 영원히 송축하라고 힘껏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103:14-17). 그리고 그러한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있도록 부디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하게 지키고 종으로서의 법도를 확실하게 행하라”(18)고 거듭 백성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17:7-10);

넷째로, “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03:19-22); 수명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하게 보시고 그 죄과를 도말하시고 영생의 구원을 주기 위하여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은혜를 다윗은 시편 제103편에서 히브리어 가알속량의 은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던 아담을 다시 영생의 하나님 처소로 맞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신원회복의 구원역사가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선견자 다윗이 너무나 기뻐서 히브리어 케레브곧 자신의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성호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어 바라크송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뜻이 마지막 절인 제22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03:22).

그런데 천국에는 피조물이 아닌 영체들이 또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천사들이며 천군들입니다. 그들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에 그 주권에 복종하며 크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103:19-21, 5:11-12);

 

결론적으로, 피조물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들이나 천군들보다 더 연약한 존재입니다(2:7). 그러나 장차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주로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은혜를 다윗이 1,000년 전에 미리 내다보고서 시편 제103편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주님의 속량의 은혜를 영원히 송축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다윗의 영혼의 깨달음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시편 103편의 내용을 음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한평생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영원토록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성도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참고로, 히브리어 읽기표를 아래에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