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시편 제114편에 겹쳐 보이는 38년된 병자와 38선과 비느하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9. 15:29

제목; “시편 제114편에 겹쳐 보이는 38년된 병자와 38선과 비느하스”(114:1-8, 2:21, 5:5-10, 25:3-13, 31:3-8)

설교일; 주후 20215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29)

 

시편 제114편은 8절로 되어 있는 짧은 시가입니다. 그리고 그 저자의 이름이 명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으로 보아 주전 586년에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버리고 주전 516년에 제2성전이 완공되기 전 곧 예루살렘에 여호와를 모시는 성전이 없던 시절 70년 동안에 작성이 된 시로 보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여호와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유다 사람들의 심령속에 여호와의 성소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귀한 영적인 깨달음을(2:21) 114편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114:2a);

그것은 주후 30년경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그렇다면 유다 가문의 장자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가문의 계승자인 예수아가 유민들을 이끌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고토로 돌아와서 제2성전을 짓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에 말씀에 밝은 어떤 선견자가 시편 제114편을 작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스스로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이 심오하여 유다의 백성들이 즐겨 그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시편에 익명의 시가 제114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오늘날의 성도들이 애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제114편의 구절을 천천히 묵상하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예수님 공생애 당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고침을 받은 38년된 병자, 한민족의 허리를 갈라놓고 있는 38도선, 그리고 여호와를 섬기는 열심으로 반역자를 도륙한 비느하스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연상이 가능한지를 이제부터 본문을 한 구절 씩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114:1-2); 주전 1,446년에 장정만 60만명 곧 200만명이 넘는 남녀노소 이스라엘 12지파의 자손들이 출애굽을 경험하게 됩니다(12:37-42);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범신론적인 사회에서 탈출하여 유일신 여호와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섬기는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114:1a). 그때부터 선민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신 창조주 여호와를 그들의 구원의 신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전 960년경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을 완공한후(왕상6:1, 38) 성소를 그곳에 두고서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고 나름대로 여호와를 모시는 선민으로서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상당히 다른 시각에서 출애굽의 역사와 성소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출애굽기의 근거가 창세기에 실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114:1b). 야곱이 아들과 손자들 66명을 비롯한 집안의 식구들을 전부 이끌고 주전1,876년에 애굽으로 이주합니다(46:26-27). 그 이유는 가나안 땅에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먹고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45:6). 애굽에서는 22년 동안 생사를 몰랐던 11번째의 아들 요셉이 그곳의 총리가 되어 있어 가족들을 전부 초청한 것입니다(45:9-11);

애굽의 고센 땅에서 430년을 지내는 사이에 야곱의 집안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브엘세바에서 이스라엘 곧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그의 자손들을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고자 하십니다(46:1-4).

둘째,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12지파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는 신정국가를 성립시키는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창세기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신앙을 가진 사람이 언어가 다르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땅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신앙을 지키는 한편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는 선지자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14:18-20, 20:7).

그와 같은 측면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서 제례의식과 율법생활을 영위한 것보다는(114:2b) 자신의 심령속에 여호와의 성소를 만들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여호와신앙의 본질입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114:2a).

왜냐하면, 훗날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에게 자신의 마음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예배자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그와 같은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예수님 공생애 당시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드론 샘물을 길어와서 부어 놓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은 거룩합니다. 그 이유는 그 물을 가져와서 성전의 뜰에 있는 물두멍에 채우고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혹 천사가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와서 그 물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서 가장 먼저 입수를 하는 병자나 장애자가 말끔하게 치유가 되는 기적이 발생합니다(5:4). 그러한 연유로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온갖 병자와 장애자가 즐비합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보셨습니다. 갈릴리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모든 병자와 장애자를 창조주의 능력으로 치유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4:23). 그런데 성전 가까운 그곳에서는 그러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는 죽을 때까지 그 연못에 일등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38년된 장애자 한사람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5:5-9).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영원히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38년된 장애자를 돌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제25장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그것이 이른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38년을 지내고 있는 장애자는 자신의 손과 발로 결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 가장 중심에 모시고서 오로지 장애가 떠나가기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기막힌 간구의 세월이 자그마치 38년입니다. 그 참상을 보시고 지극히 불쌍하게 여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거듭난 새로운 삶을 그자에게 선물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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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3.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4.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114:3-4); 약속의 땅 가나안은 동과 서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동에는 요단강이 있고 서에는 지중해인 대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전 1,446년에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12지파의 백성들은 40년 후에 모세의 지휘하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아모리 두 왕국의 땅을 점령한 후에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요단강은 동편의 2지파 반 그리고 서편의 9지파 반을 가르고 있는 분깃점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마치 해방이후 한민족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38선과 같은 것입니다. 주후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38도선은 서로는 남으로 내려오고 동으로는 북으로 올라가는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남한과 북한의 군사분계선은 마치 태극기의 태극 문양과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명 DMZ라고 불리고 있는 비무장지대가 언제 사라지고 한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와 같은 민족적인 소원을 담고 있는 노래가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단은 물러갔으니, 4.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114:3b-4). 비무장지대가 평화의 동산이 되며 그곳에서 온갖 짐승들이 즐겁게 뛰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주전 1,406년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서 앞장을 서자 요단 강물이 갈라지고 맙니다(3:15-17). 나중에 그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서 이스라엘 12지파가 동과 서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치 군사분계선과 같은 요단강이 다시 갈라지고 이스라엘 12지파가 하나될 수 있는 것일까요?

시편 제114편의 저자는 그날이 영적으로 벌써 다가왔다고 본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과 서의 양들이 서로 오가면서 기쁨의 환성을 지르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때에는 요단강 뿐만 아니라 대해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벽이 될 수가 없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114:3a).

오늘날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장벽이 되고 있는 대해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동남으로는 자유 자본주의 진영이고 서북으로는 공산권 진영입니다. 그들 양진영이 지난 20세기 후반에 서로 으르릉거리다가 1991년에 소련이 붕괴가 되었지만 다시 중공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오늘날 미국과 체재경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미중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한민족의 살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대해와 같은 장벽이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빨리 제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제114편의 노래를 다시 불러보고 싶습니다.

셋째로,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6.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114:5-6); 언뜻 보면 5절과 6절은 앞서 있는 3절과 4절을 다시 노래하고 있는 반복입니다. 그러나 의미를 따져보면 그것은 중첩이 아니고 엄연히 다른 측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영적이며 종교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지중해 무역을 영위하고 있는 페니키아인들의 우상을 도입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합 왕 때에 기승을 부린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입니다(왕상16:30-33). 그리고 가나안 남쪽 연안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해양민족 블레셋의 우상 바알세불을 가져와서 섬기고 있습니다(11:15).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단강 동편에 있는 여러 이방족속들의 우상들도 전부 도입하여 섬기고 있습니다(왕상11:4-8). 솔로몬왕 때부터 자행이 된 잡신문화가 완전히 제거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선지자 예레미야의 지적과 같이 높은 산과 낮은 산 구별하지 아니하고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며 성적으로 문란행위를 일삼는 이스라엘 민족의 타락상이 넘쳐나고 맙니다(2:20);

그와 같은 잡신의 시대를 시편의 저자는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완전히 제거할 것이라고 본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6.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114:5-6).  영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타락한 산들이 이제는 여호와를 섬기는 선민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차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시인이 그와 같이 힘있게 노래할 수 있는 근거를 모세오경 가운데 민수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비느하스의 열심과 관련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 전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전 1,406년경 모세가 요단강 동편 아모리 두 왕국을 점령한 후 이제는 여호수아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우고 요단강 서편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자 마지막 준비를 싯딤 지역에서 갖추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군대의 진영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습니다(25:1). 젊은 장교와 군병들이 모압 여인들을 따라 남쪽 십리길에 있는 높은 산 브올에 올라가서 우상 바알을 섬기고 2부순서로 여사제들과 육체적인 향연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25:2). 그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전염병 재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25:3, 9).

(2)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전염병이 백성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즉시 가담자를 색출하여 처형하고 있습니다(25:4-5). 그러나 여전히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고라 자손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사건의 진원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 결과 시므온 지파의 젊은 족장 시므리가 미디안의 공주인 고스비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서 그 사건을 조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25:18). 비느하스는 분노하여 즉시 시므리의 장막으로 쳐들어가서 그들 남녀를 단숨에 장창으로 척결하고 맙니다(25:14-15). 그러자 거짓말처럼 전염병이 멈추고 있습니다(25:7-13);

(3)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미디안 북부의 5부족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아람의 거짓선지자 발람의 꾀를 사들인 미디안 5부족의 왕들이 재녀 고스비를 이스라엘 진영에 밀파하여 미인계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31:2). 모세는 각 지파에서 1,000명씩 도합 12천명의 기마병을 차출하여 미디안 북쪽지방까지 원정에 나서게 합니다(31:4-6). 여호와의 명령으로 원정에 나섰기에 막강한 미디안 5국가를 정복하고 5왕과 무당 발람까지 사로잡아 처형하게 됩니다(31:8). 그와 같은 역사를 되짚어보면, 본문의 승리의 노래는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6.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114:5-6).

넷째로, “7.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8.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114:7-8); 그 마음속에 성령의 전을 모시고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입니다(14:16-17, 고전6:19);

그 점을 벌써 구약의 시인은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114:2)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속에 여호와의 성전이 생기고 그곳 성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고 있으면(114:2a) 그러한 성도의 거듭난 삶은 영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이 됩니다. 그와 같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게 되면 새로운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고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이른바 하나님의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114:2b).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온세상에 나아가서 이방인 선교에 나서게 됩니다. 그들의 앞길을 막는 세력이 승리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시인은 그것이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창조주의 권능이 성도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의 역사를 참조하면 여호와의 권능은 두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의 무법자이며 패배를 모르는 약탈자 아말렉 족속의 기습을 무위로 만들고 그들을 패주하게 만드는 놀라운 위력을 여호와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17:8-16);

 그때부터 광야의 족속들은 감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막아 서지 못하고 벌벌 떨게 됩니다(114:7, 18:9-11).

또 하나는, 마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광야에서 40년간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생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역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17:6-7, 20:11). 그것은 지하의 광천수가 샘솟는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체인 바위와 차돌이 액체인 물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는 8.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114:8)라고 시인이 정확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서도 성도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앞이 캄캄한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가 세가지입니다; 첫째, 오랜 질병과 장애가 도저히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민족분단의 역사가 한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셋째, 영적 성적인 타락과 더불어 전염병이 물러가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캄캄한 시대에 시편의 저자는 본문 제114편의 짧은 8절의 말씀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자 어느 사이에 개인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 치유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앙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주님처럼 그 뜻을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