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형제의 연합이 선하고 아름답게 되자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5. 08:11

제목; “형제의 연합이 선하고 아름답게 되자면”(133:1-3)

설교일; 주후 20215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55일 작성)

 

시편 제120편에서 제134편까지 15편의 시가(詩歌, 시적인 노래)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솔로몬의 시가 1(127) 그리고 다윗의 시가 4(122, 124, 131, 133)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드릴 시편 제133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성막 또는 성전에 올라가는 다윗왕의 감사와 찬양의 노래  4편의 시가 가운데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의미가 심오하고도 광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씀을 먼저 드릴 수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고 있는 모습이 선하고 아름답게 될 수 있도록 다윗왕이 간절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선하다고 하는 것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다(טֹ֑וב)고 하는 것은 태초부터 모든 피조물을 골고루 돌보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1:31). 그러므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와서 구현하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의 발현인 것입니다(11:4-5).

그러한 맥락에서 다른 생명을 죽이고 내가 먼저 살아야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인간의 불의한 관념이며 불경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인간세상에서 그것이 어떠한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권위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선이 아니라 악인 것입니다(11:50).

그와 같은 입장에서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을 행하는 것과 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3:4).

현실적으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이 과연 그와 같은 절대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뜻을 온전히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저 먼저 살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소위 원초적인 육신의 욕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6:3, 7:23-24).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 그리고 그 이유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도들에게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14:38);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제 먼저 살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육신을 가진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이 인간의 영혼을 깨우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우심을 달라고 간구하는 성도들의 정직한 기도인 것입니다.

둘째로, 여기서 다윗왕이 아름답다(נָּעִ֑ים)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본래 즐겁다고 하는 의미인데 그것은 태초에 창조주께서 사용하신 용어 보시기에 좋았더라”(1:4)를 염두에 두고 있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선하다고 하는 히브리어 토브’(טֹ֑וב)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관리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시고 나서는 그 만족감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스스로 평가하십니다(1:31);

그러한 맥락에서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선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왕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게 보이게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찾아보기 위하여 이제부터 시편 제133편을 다음과 같이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고 하는 것은 다윗왕의 시대에 있어서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신앙공동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제국의 황제에 해당하는 대왕이지만 그는 정치적인 공동체를 넘어서서 그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보다도 성소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한마음으로 섬기면서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선민들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여호와신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동단결하였을 때에 그것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선민의 나라가 강력하게 된다는 것이 다윗의 생각입니다. 그와 같은 다윗왕의 깨달음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러한 의미가 벌써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라고 하는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133:1a). 왜냐하면, ‘형제라고 하는 용어가 실제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5, 2:29, 15:23).

그렇지만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피조물인 형제들과 만물을 골고루 돌보며 그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과 지혜로써는 불가능합니다. 그 점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담부부의 장남인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쳐죽이고 있습니다(4:5, 8). 그리고 쌍둥이 동생인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있으며 에서는 동생에게 살의를 품고 있습니다(27:30, 41). 나중에 다윗왕의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에게 성폭력을 행사하고 그 때문에 그녀의 오라비인 압살롬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삼하13:14, 28-29)”;

그러므로 성도들이 형제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각별한 도우심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구세주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여 기도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그때부터 성도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1:8, 2:1-4, 40-47).

둘째로,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133:2);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하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성막을 짓게 하고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삼으십니다(25:8-9, 28:1, 30).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이 된다는 표시로 보배로운 기름인 관유(the anointing oil)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서 위임제사를 일주일간 드리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29:1-7, 37);

시편 제133편의 저자인 다윗왕이 그러한 사실을 히브리정경을 통하여 벌써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다윗은 출애굽기 제19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내용 곧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뜻에 따라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19:4-6).

따라서 다윗은 아론이 관유를 머리에 부음 받아서 그때부터 대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자신의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도 제사장나라의 성도 답게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을 그 머리에 받아서 거룩한 백성들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사장으로 구성이 되는 선민의 나라는 두가지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선민들이 모두 제사장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들과 만물을 구원하는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 제사장인 욥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깨닫게 된 귀중한 교훈 곧 여호와의 제사장은 모두 이방인의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려주는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미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42:10).

또 하나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중보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백성들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다윗의 기도 곧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33:1)라는 구절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다윗은 아론의 수염을 타고 대제사장의 예복에 흘러내리고 있는 그 보배로운 기름을 부러워하면서 그 일이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있기를 여기서 간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33:2).

셋째로,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을 명령하셨나니,  영생이로다”(133:3); 여기서 헐몬이라고 표현이 되고 있는 산은 가나안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인 북쪽의 헬몬 산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헬몬 산은 해발 2,814미터이므로 한반도의 백두산보다 64미터 정도 더 높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년 12달 가운데 8달은 흰 눈을 머리에 이고서 그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4달 동안 정상에 쌓여 있는 눈들이 녹아서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요단 강을 타고서 남하하게 됩니다. 그 강물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적시면서 농사를 짓게 하고 목축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헬몬 산의 이슬은 두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농업과 목축업을 영위하게 해주는 고마운 물의 근원입니다. 또 하나는, 높은 산을 만드셔서 생명의 물을 평지에 공급하여 주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은혜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왕은 전자보다는 후자의 의미를 담아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을 명령하셨나니,  영생이로다”(133:3)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국의 국왕이 되어 주변의 열강들을 치고서 거대한 이스라엘 제국을 형성하였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세상적으로는 위대한 정복자가 되어 엄청난 영광을 누리고 있지만 그 반면에 전장에서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흉악한 죄인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적으로 평안이 사라지고 계속 반란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하는 여생을 보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에 따라 노년의 다윗왕은 세가지의 소원을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동족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한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나라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133:1-2). 둘째, 그의 제국을 무사히 후계자 솔로몬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133:3a). 셋째, 고난의 삶을 끝내고 이제는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서 영생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133:3b);

 

결론적으로, 다윗왕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지막으로 제133편에서 자신의 세가지 소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백성들이 여호와신앙으로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둘째, 제사장나라의 백성 답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 자신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신실한 성도의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다윗의 소원이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의미를 생각하시면서 거듭 시편 제133편의 짧은 구절을 자주 묵상하고 그 영적인 깨달음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첨부; 히브리어 읽기 표;